본문 바로가기

엮는 일

거대충돌가설

D-?


  길게 하품을 하며 거실로 나온 세란은 부산스러운 등짝을 보았다. 세영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흘러간 걸그룹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으레 해오던 난장을 벌이고 있나 보다 하는 생각으로, 불쑥 그의 옆으로 다가간다.

  “뭐 해.”

  놀라지도 않고 저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 낯짝. 세란은 세영의 이런 점이 재수없었다. 자신이 이 시간 즈음에 일어나 당연히 세영에게로 와서 무얼 하느냐고 물을 것을 예상했다는 그 자신감이.

  “아, 심심해서 창고를 좀 뒤져봤거든. 이런 게 있길래. 손보면 쓸 만해 보이더라고. 거의 다 됐어.”


  세영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미끈한 빨간 라디오였다. 쓸 만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나 괜찮은 생김새라고 세란은 생각했다. 오 분 정도가 더 지나자, 라디오가 고쳐진 모양인지 지지직 거리는 송출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속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소리들에 세영은 뭐라는 거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안테나를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곧 소리가 선명해졌다.

  “...지구에 충돌할 확률이 높아보인다는 나사 미 항공우주국의 공식발표가 방금 있었습니다.”

  그새 관련기사를 찾아 본 모양인지, “달이 오고있대.” 하는 세영의 목소리가 세란에게로 와 박혔다. 고물 라디오가 간만에 세상에 나와 전해주는 첫 소식 치고는 너무 파격적인 내용인지라, 세란은 라디오가 견디지 못한 나머지 수명을 다 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D-7


  밤새 고양이들이 난리더니 동이 틀 무렵부터는 또 개들이 아우성이었다. 달을 보며 그렇게 울고 짖어대던 것일까. 뒤척이던 세란은 마지못해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쳤음에도 잠이 깨지 않은 세란은 욕실을 나서지 않고 멍하게 욕실 조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자가 고운 수증기들이 솟구치는 모양새가 크리스탈 등에 역광으로 비춰지는 것이 꼭 은하수 같았다. 크리스탈 등은 이 집을 구하고 나서 세영이 건드리지 않은 유일한 물건이었다. 온통 뒤죽박죽이었던 집에서 이상하게 차분한 물건이었다. 왜 하필 욕실에다가 이런 비싸보이는 조명을 달았을까, 하는 세란의 의문에 화장실만큼 중요한 데가 어디있겠냐면서, “목욕은 영혼의 세탁이라잖아.” 하며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대사를 뱉는 세영이었다.

  지상으로 2층, 지하 1층, 이렇게 총 3층으로 된 이 집에 형제가 자리잡게 된 지도 어느덧 2년이 다 되었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평수임에도 꽤 싸게 구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집이 흔히들 말하는 ‘달동네’의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영이 이 곳을 고른 이유이기도 했다. 형제는 세상에서 조금 떨어져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이 집보다 더 적당한 곳이 없었다. 다만 오래 방치되어 온지라 건물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사 전에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했다. 대부분을 세영 혼자서 해냈다. 그 중 세영이 가장 신경 쓴 공간은 2층의 거실이었다. 세영은 창문을 크게 넓혀, 이 집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 최대한의 하늘을 거실로 스며들게 했다. 세란은 그것이 자신을 위한 형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실제로도 집에서 그 곳을 가장 좋아했다. 도심에서 섬처럼 뚝 떨어져 나온 동네였지만, 세란이나 세영이나 큰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세영은 운전을 할 줄 알았고, 세란은 창고를 뒤져서 나온 자전거를 끌고 나서곤 했으니까.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달이 지구를 향해 오고 있다고? 세란은 아직도 그 사실이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입에 풀칠하기 바쁜 사정이 있어 그런 것에 신경 쏟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세영이 고쳐낸 이후로 시도새도 없이 속보를 전해주고 있는 빨간 라디오에 따르면, 충돌까지 앞으로 일주일 남았다고 한다. 천천히 다가오고 있던 달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나. 세란은 수증기를 내보내기 위해 욕실 쪽창을 열어제꼈다. 동이 터오는 기색 위로 타오르듯 붉은 달의 모습이 보였다.


D-3


  “도심 쪽은 난리인 모양인데, 이 동네는 정말 너무 조용해. 형도 그렇고. 지금 일을 하고 있을 타이밍이냐고. 클라이언트들 연락도 진작 끊긴거 아니었어?”


  세란이 태평할 정도로 컴퓨터 앞에만 붙어있는 세영더러 하는 말이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이러다가 달님이 맘 바뀌어서 다시 돌아가버리면 큰 일 나버리는 거라고요.”


  말 끝을 늘이면서, 역시나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세영이었다. 사실 태평까지는 아니어도 그리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세란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세란은 언젠가 들어보았던 ‘거대충돌가설’을 줄곧 떠올리고 있었다. 본래 달과 지구는 하나였으나 지구와 궤도를 같이하던 가상의 물체가 지구에 충돌하면서 분리되었다는 가설. 어쩌면 달은 원래 자신의 몸이었던 지구와 하나되기 위해, 몇 십억 년의 시간을 기다려 이제야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디오 뉴스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방송이라며, 지금까지 함께 해주어서 고맙다는, 한참을 뜸들인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느끼고 있는 듯했다. 다시 지지직거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주파수 다이얼을 돌려보아도 모든 방송국에서의 송출이 중단된 모양인지 변하는 것은 없었다. 세란은 조용히 형, 하고 여전히 일에 열중하고 있는 세영을 불러보았다. 세영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달 구경하러 가자.”

  달은 붉고, 또 거대해서,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슈퍼문 쇼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D-Day


  때가 되자,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2층의 거실에 앉아 통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영은 커피를, 세란은 코코아를 탄 잔을 각각 들고서. 우루과이에 먼저 충돌한다고 했던가. 시간이 꽤 지났으니 그 여파가 이 곳을 덮치는 것도 곧일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신자라면서. 기도 안 해?”

  무릎을 끌어안고 코코아를 마시던 세란의 질문이었다. 줄곧 눈을 감고 있던 세영은 “뭐 바라는 게 있어야지 기도를 하지요.” 하고 능청스레 대꾸한다. 세영이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가 이어진다.

  “내가 바라는 건 이미 다 이루어졌어, 세란아.”

  커피 잔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세란은 세영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세란은 달이 지구를, 이 동네를, 그리고 이 달동네에서 가장 먼저 종말을 맞게 될 이 집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실감했다. 발 끝을 바라보고 있던 세란도 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달에게 표정이 있다면, 세영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엮는 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Sugar High  (0) 2018.02.17
Caramel Colored 797  (0) 2018.02.11
Clockwork Love Child  (0) 2018.02.11
그들이 사는 도시  (0) 2018.02.11
만남의 광장  (0) 2018.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