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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Clockwork Love Child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최루시엘이 첫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궁금합니다. 상대의 성별이나 나이, 인종 등에 관계없이 완벽하게 빠져들어 버리는 순간의 최세영을 보여주세요! 


 그는 그것이 태엽 같다고 생각했다. 정교한 장난감에나 붙어있을 법한 생김새였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금으로 된 귀걸이 클러치였다. 턱을 괴고 그것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손을 뻗어 그것을 감아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며칠 전 의도치 않게 '정보'를 접하고 난 뒤부터, 그는 줄곧 그 태엽을 좇아 그것의 뒤에 자리잡곤 했다. 교수는 한창 맥의 역사에 대해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1980년대 초, 애플은 최초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적용된 데스크탑을 내놓았죠. 그것이 바로 리사 프로젝트입니다."


  서서히 하늘 한 가운데를 향해 오르고 있는 태양의 빛이 창을 넘어 태엽이 매달린 귓불을 비추고 있었다.


  "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스티브 잡스의 딸 이름에서 따온 것이죠."


  그러니까, 저 태엽의 주인이, 매일 저 딱 달라붙는 귀걸이를 하고 다니는, 저 애가.


  "그리고 리사는 잡스가 혼전에 낳은"


  이 유서 깊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학 총장의,


  "사생아죠."


  ―라는 거지. 그는 시선을 클러치에 고정한 채 눈을 감았다가 다시 가늘게 떴다. 어쩌면 저것은 정말로 장난감 태엽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샤워를 마친 그는 공동욕실을 나서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속한 4인실의 욕실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에 고작 하나 딸린 화장실이 으레 그러하듯, 적절한 시간에 사용할 틈이 어지간해서는 나지 않았다. 초단위로 돌아가는 자신의 세계에서는 일상적인 기다림마저 사치였다. 당장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임무들이 이미 산더미였다. 씻고 나왔음에도 그다지 피로가 가시지 않는 느낌이어서,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짜증스레 털면서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젠장. 남자는 들어서자마자 발에 치이는 맥주병을 걷어찬 뒤에 욕지기를 뱉었다. 룸메이트라는 작자들이 대낮부터 벌여놓은 난장 때문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루시엘, 너도 낄래?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서서 물을 뚝뚝 흘리며 현관 발판을 적시고 있는 그를 보며 룸메이트 중 한 명이 눈이 잔뜩 풀려 하는 이야기였다. 분명히 빈말일 것이다. 룸메이트는 말을 마치고 낄낄 거리면서 웃더니 줄곧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여학생에게 연신 키스를 퍼부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그는 생각했다. 타 기숙사 학생들일까. 소파며 바닥이며 할 것 없이 널브러져 엉겨있는, 열댓 명 즈음은 되어 보이는 그들을 보니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수건을 패대기친 채 한 명 한 명을 발로 차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방에서 작업하기에는 글렀다. 의자에 걸쳐져 있는 옷가지들을 손에 걸리는 대로 주워 입은 그는 랩탑을 집어든 뒤에 헤드폰을 쓰고 음악의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그대로 방을 나서려던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경을 쓰자 안 그래도 난장이었던 방의 풍경이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시야에 펼쳐졌다. 그는 맥주병을 다시 한 번 걷어찼다. 죄 없는 롤링락 맥주병은 벽난로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낸 뒤 깨져버렸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 작은 소란에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그가 방을 나서는 지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늘 작업하곤 했던 학생 식당은 일찍이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인근 카페테리아라도 찾아보는 게 좋을까 싶었지만 지금 나가서 자리를 잡아봤자 곧 저녁이 되어 어디든 붐빌 것이 뻔했고, 또 고작 앉을 자리 하나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에 코드하나 더 쳐내는 것이 훨씬 현명한 처사였다. 그는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다시 기숙사 건물 앞으로 돌아와, 건물 사이에 있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온갖 신입생 환영파티며 개강파티가 벌어지는 이 주말에 굳이 이런 곳에 와서 기웃거릴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랩탑을 열어젖히고 작업을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이 거의 마무리 되어갈 무렵 그는 눈이 부셔 고개를 들었다. 이 빽빽한 캠퍼스에서 유일한 공백과도 같은, 기다랗게 내어진 건물 틈 사이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서서히 내려오는 푸른 저녁하늘과 석양이 꼭 실린더에 섞여들어 가는듯한 모양새였다. 저 너머 도시의 밤이 시작되는 소리도 서서히 그에 스며들고 있었다. 잠깐 쉴까. 그는 한껏 굳어있던 어깨에 힘을 풀고 다리를 뻗었다. 하염없이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와중에, 무언가가 그의 시야 앞으로 쑥 들이밀어졌다.


  "뭐해?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과제는 아닌 거 같고."


  그는 하마터면 랩탑을 계단 아래로 집어 던질 뻔했다. 그는 넋을 놓고 석양을 보던 표정을 그대로 지은 채 불청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청 본격적으로 보이던데. 설마, 무슨 해킹이라도 하는 거야?"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작은 큐빅 귀걸이가 석양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 너구나.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찌하지 못하고 방황시키다가 "리사." 하고 중얼거렸다. 리사라니, 누구 이야길 하는 거야? 뜻 모를 그의 말에 '리사'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중에 랩탑에서는 새 메일이 수신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그것의 제목은 '요원 707 EXTREME의 조속한 임무 보고 바람.' 이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넘어간 후였고, '리사'는 좀 전의 '요원 707 EXTREME' 못지않게 얼이 빠진 표정으로 상황을 정리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정보원이라는 거고.”


  ‘리사’는 숨을 한 번 삼켰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와는 달리 완전히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그걸 한 마디라도 밖에 꺼냈다간 내 정체를 이 근방 모든 대학교 시스템에 도배해버릴 거라는 거지.”

  “맞아. 잘 알아들어서 다행이네.”


  리사. 하고 말을 맺는 심드렁한 그의 태도가 못마땅한지 ‘리사’는 짐짓 눈을 흘겼다. 그렇게 부르는 것 좀 그만하면 안 돼? 하고 터져 나오는 불만에 그는 “어차피 지금 쓰는 이름도 진짜 이름 아니잖아. 정 아니꼬우면 잘난 너네 아버지한테 네 이름 딴 컴퓨터던, 동상이던 건물이던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던지.” 하고 다소 삐딱하게, 흐르듯 대꾸했다. 기분이 나쁠 법한데도 ‘리사’의 표정에는 그런 기색이 비춰지지 않았다. 좀 전에 받은 충격이 워낙 커서일까. 복잡한 심경을 소화하지 못하고 새어나온 한숨만이 그의 얼굴에 와 닿았다.


  “아무튼. 대단하다 너, 심심해서 총장님 개인 메일을 털었다니.”

  “가끔 손가락이 안 풀리면 재밌는 일을 찾아 헤맬 필요가 있거든. 넌 거기에 재수 없게 걸렸을 뿐이고. 그나저나, 다들 어디 기어 나가느라 정신없는 것 같던데 넌 왜 학교나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야?”

  “저녁 즈음마다 학교 주변 돌면서 조깅하거든.”

 

  ‘리사’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총장님 말이, 조용히 지내라고 하길래…….”

  

  ‘리사’는 말끝을 흐리다가 뭐, 분부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 하고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웃은 것 같았다.’라고 해야 할까. 그 표정이 제법 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느 주말 저녁에 이루어진, 떳떳하지 못한 그들의 수상한 회동 이후, ‘리사’와 ‘요원 707’은 강의실에서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같이 식사를 한다던지 하는 친밀한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제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거창해지는 룸메이트들의 파티 행렬에 질릴 대로 질린 그는 저녁마다 랩탑을 챙겨 학교 구석구석을 헤매며 작업할 자리를 찾아다녔고 ‘리사’ 또한 ‘분부대로 얌전히’ 지내기 위해 저녁마다 캠퍼스를 돌며 조깅을 했다. 가끔 캠퍼스 어딘가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마주치면 그가 끼니를 제때 챙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 챘는지 식빵 한 봉지를 덜렁 놓고 가거나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 따위를 건네고 훌쩍 사라지는 것이 전부였다. 그 뿐이었다. 서로가 제대로 입단속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에 대해 확인하기 위한 계약 갱신의 순간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계약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신뢰라는 것이 어느 정도 쌓아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슨 길고양이에게 음식을 나눠주듯 먹을 것들을 툭툭 놓고 가던 ‘리사’에게 그는 언젠가부터 고맙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딱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마저도 고개조차 들지 않고 건네지는 감사였다. 그 즈음부터 ‘리사’는 그의 몫에 자신의 것을 더해 챙겨오기 시작했다. “잠깐만 쉬는 거야. 귀찮게 굴지 않을게.” 하면서 그의 옆에 앉아 음료를 건네고는 일은 잘 돼가? 요새는 좀 어때? 하는 말들을 던지면서. 그는 딱히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귀찮았던 탓도 있지만 당장 제 앞에 놓인 것들을 치워내는 게 워낙 급했기 때문이다. ‘리사’도 대답을 바라고 묻는 것은 아닌 듯 했다. 쟤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어쩌면 제 학교생활을, 나아가 인생을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도화선을 그가 쥐고 있는데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건가. 어차피 태엽을 감아 ‘리사’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건 그 아비일 테니까.


  “Love Child."


  헤드폰을 벗으며, 여느 날처럼 듣는 이는 상관 않고 제 얘기를 이어나가던 ‘리사’의 말을 끊고 입을 떨어뜨린 그가 툭 뱉어낸 단어였다.


  “너무 무책임한 호칭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리사’는 그가 기숙사 건물 사이 계단에서 자신을 ‘리사’라고 처음 불렀을 때처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랑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놓고 그 당사자가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그게 무슨 아이러니냐고”


  그의 말에 너는 정말로 괜찮냐는 물음이 깔려있다는 걸 읽어냈는지, ‘리사’는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지 너에게 피를 나눠줬다는 이유만으로 네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꼭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지내게 해도, 괜찮아?


  “왜 그렇게 성을 내?”


  네 일도 아니잖아. ‘리사’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야 나도―”


  러브 차일드니까. 그는 뒷말을 잇지는 못하였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만족해. 원해서 들어 온 학교는 아니지만 정말로 즐거우니까. 아버지가 내게 호의인 척 베푸는 것들이 날 감시하고 묶어놓기 위한 것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리사’는 말을 멈추고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이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있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와 ‘리사’가 처음 만난 날처럼,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다만 그 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침묵 또한 같이 섞여 내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은 안했네.”


  그의 시선이 줄곧 귓불에 가 닿아있자 ‘리사’는 그제야 그것이 귀걸이 얘기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답답해서 잠깐 뺐었는데, 뚫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금세 막히더라고. 내가 뚫을 용기는 차마 안 나고. 귓불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리는 그 모습에 그는 대뜸 지금 귀걸이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리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줘 봐. 내가 뚫어줄게.”


  ‘리사’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동전지갑 사이를 헤쳐 귀걸이를 찾아내어 정직하게 내밀어진 그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귀걸이는 여전히 작고, 또 빛나고 있었다.

  왼 쪽부터 뚫을게. 그는 귓불을 잡고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선뜻 그것을 찔러 넣기가 어려워 주저했다. 그는 어느새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이 떨리기라도 할까 천천히 숨을 내쉬며, 귀걸이를 밀어 넣는다. 그와 동시에, 손등과 손가락 가운데 마디에 스치운 뺨의 솜털이 서는 것을 느낀다. 찰나의 찡그림으로, 그는 ‘리사’가 소리 없는 신음을 내고 있음을 알았다. 그 신음이 부디 앞으로도 새어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귀걸이의 뒤를 막았다. 태엽을 감듯, 클러치를 돌려 끼우고선, 가만히 귓불을 쓸어본다. 그는 ‘리사’ 또한 그제서야 숨을 고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쁘지만 그것을 숨기려 파도처럼 밀려오는 호흡이었다. 그 눈가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


  그가 무심코 부른, 아마도 타인에게서 처음 불렸을 자신의 이름에, 파도가 부서진다. 물보라가 한껏 튀어서, 그 또한 한껏 웃어보였다. 마주하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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