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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Sugar High

2018.02.17 수상한 메신저 전력 60분 - 농담/쓸쓸한 전화


  이당류라는 것들은 늘 갈증을 남긴다. 본체의 성질보다 더 끈적이고 질척이는 부산물. 그것은 죄책감과 닮아있다. 고약하게도, 인간의 뇌는 오로지 포도당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 주어진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뇌수에 당을 공급해야 한다. 결국 삶이란 채울 수 없는 갈증, 속죄할 수 없는 죄의 기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적어도 세영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설탕은 갈증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죄책감을 상기시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설탕을 갈구해야만 한다. 고양에 도취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스름하고 푸른, 새벽과 닮은 빛을 뿜어내는 모니터를 마주한 채, 세영은 두 캔 정도되는 에너지 드링크를 연달아 들이켰다. 수 분 정도가 지나자, 혈관에 당이 퍼지는 것이 느껴진다. 고양감을 업은 탈력의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의자의 등받이를 있는대로 밀어 눕듯이 늘어졌다. 그와 동시에, 네댓 개되는 핸드폰 중 하나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세영은 헤드셋을 쓰고 음악의 볼륨을 최대로 키운 뒤, 허공을 응시하던 그대로 책상에 손을 뻗어 그 위를 흐트러뜨리듯 훑었다. 문제의 핸드폰을 집어든 세영은 액정 안에 든 내용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Web발신]
(보이스피싱 주의)가족을
납치했다고 속이는 보이스피싱
전화에 주의하세요.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실로 농담 같은 텍스트. 아니다, 이것은 농담보다도 지독하다고 할 수 있겠다. 세영은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진 후 고개를 젖혀 있는대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헤드셋에서 골을 울리듯 빠른 비트로 흘러나오던 노래는 웃음 소리에 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문자를 받고 난 이후부터, 세영에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싶으면 사방 천지에 흩어져 있는 ‘최세란’이라는 이름을 한 연락처들 중 하나를 골라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다짜고짜 새벽에 걸려온 발신자표시제한 전화를 받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애초에 받기를 바라고 건 전화도 아니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은 이가 욕지거리나 뱉는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가끔 전화를 받은 상대방이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수 분을 버틸 때마다 세영은 곤혹스러웠다. 세란에게 거는 전화였지만 세란에게 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세란들이 ‘최세란’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무 반응 없는 저 너머의 세란에게서, 꿈에서 몇 번이고 듣고 보아왔던 자신의 ……를 이 순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세영은 목이 말랐다. 하지만 물을 마시는 대신, 언제나 그래왔듯이 책상이며 바닥에 치일 듯이 굴러다니는 에너지 드링크 캔을 하나 집어 단숨에 들이켰다. 갈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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