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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만남의 광장

알바킹 최세영과 어쩐지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주인공이요..."여기서도 일해요?" "저번 직장은 잘렸거든요." 사정이 있어서 여기저기 알바를 옮겨다니는 최세영이요... 


  "6700원 입니다."
  여자는 주문한 음료를 계산하기 위해 카드를 내미려다가 점원의 얼굴을 보고는 멈칫했다. 점원도 움찔하는 듯 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카페의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세영 씨, 계산 안 해 드리고 뭐해. 아는 사람이야? 하고 묻더니 여자와 '세영'이라고 불린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아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그것이긴 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여자와 세영이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여자는 일단 계산을 한 뒤 음료를 받아 맡아놨던 자리로 돌아왔다. 세영과 마주친 것이 벌써 네 번째였다.

  "안경 벗으셨네요? 못 알아볼 뻔했어요."
  청소를 하던 남자가 자신의 테이블 근처로 오자 여자가 불쑥 말을 던졌다.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대답했다.
  "면접 볼 때 사장님이 안경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그러셨거든요."
  아무래도 여자 손님들이 많아서 그런가. 하고 덧붙이는 남자에게 여자는 '확실히 너무한 안경이긴 했어요.' 하는 말이 나오려는 걸 겨우 삼켰다.
  "그런데 지난 번엔 PC방에 있지 않았어요? 아닌가, 주유소였나?"
  "빵집도 있어요."
  그래, 빵집도 있었지. 참.
  "거긴 다 그만둔 거에요?"
  "그게, 잘렸거든요."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는 남자를 보면서 여자는 남자와 마주쳤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첫만남은 주유소였다. 푹 눌러 쓴 모자 밑으로 비져나온 그의 선명한 머리칼을 기억한다. 오며가며 적은 양을 자주 주유하러 갔던 탓일까. 남자는 얼마 지나지않아 여자를 알아보게 된 듯 했고, 주유하는 동안 싱거운 농담을 툭툭 던지곤 했다. 여자는 별 대꾸는 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 어지간히도 넉살 좋은 사람이려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실없는 장난에 웃어주기라도 하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인지 남자는 여자의 반응에 꽤나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래서일까, 하루는 차창으로 상체를 쑥 들이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언제 세차 무료로 해 줄테니까, 말만해요."
  찡긋하는 눈짓은 덤이었다. 하지만 이 다음 번 여자가 주유하러 갔을 때, 남자는 없었다.
  두 번째 만남은 빵집에서였다. 새로 개업한 가게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그 곳에서 여자는 익숙한 뒷모습과 조우했다. 그러니까 그 빨간 뒤통수 말이다. 빵을 골라 집은 뒤 계산대로 다가가자 남자가 뒤돌았다. 앞치마 차림이 썩 잘 어울렸다. 남자는 이번에도 역시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야구모자가 아닌 베레모 같은 종류였다. 때문에 챙에 가려지지 않은 얼굴을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여자는 세차 이야기는 어차피 일 그만 둘 생각이어서 꺼낸 것이었냐고 물으려다가 속좁은 사람처럼 비춰질까 싶어 그만두었다. 남자는 묵묵히 계산만 하고 아무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뒤로도 꽤나 자주 그 빵집을 찾았으나, 남자는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여자를 알은체 하지 않았다. 하루는 빵집을 다녀왔다가 자신이 고른 적 없는 빵이 섞여 있는 것을 본 여자는 의아해했다. 그리고 그것이 남자의 서비스라는 걸 곧 깨달았다. 다음에 감사인사를 해야겠네. 하고 마음을 먹었지만, 이번에도 그 다음은 없었다.
  마지막 만남은 PC방에서였다. 노트북이 뻗어버리는 바람에 업무에 지장이 생긴 여자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사실 여러가지 있었지만, 통장 사정으로 인해 '수리를 맡긴다'와 '새 노트북을 산다'의 두 가지 선택지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여자는 할 수 없이 PC방 행을 택했다. 하지만 거기서 남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PC방에 들어설 때만 해도 카운터에 앉아 헤드폰을 낀 채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남자일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일단 조명이 워낙 어두웠으니까. 어수선한 분위기에 겨우 적응해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와중에 여자는 '카운터 메시지' 창에 알림이 뜬 걸 보았다.
  [ 빵은 잘 먹었어요? ]
  여자는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고, 계산을 하러 갔을 때 남자 또한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여자가 기억하는 남자와 마주친 순간들이다.

  "왜 이렇게 여기저기 옮겨 다녀요?"
  "아니 참, 잘린 거라니까요."
  여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이 사실 같지가 않았다. 남자는 '일머리'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금고라도 털었나보네."
  여자의 말에 남자가 무슨 소리냐면서 손사레를 치며 황당하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워낙 어리버리해서요. 많이들 답답해 하시더라구."
  "그럼 이번엔 얼마만에 잘릴 예정이세요?"
  "글쎄요? 아, 사장님이 쳐다본다. 저 이만 청소하러 가볼게요."
  "저기, 잠깐만요."
  여자는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 남자를 붙잡았다.
  "그 때 그 빵, 잘 먹었어요. 엄청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남자는 슬쩍 웃었다. 여자는 영수증에 무언가 끄적이더니 남자에게 건넸다.
  "이거 제 번호니까, 연락해요. 빵 그거 답례할 테니까."
  알겠죠? 꼭이에요, 세영 씨. 하고 여자는 바로 카페를 나섰다. 남자에게서 연락이 올 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분명 어딘가에서 또 마주치겠지-, 하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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