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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그들이 사는 도시

김경주의 비정성시에서 "나의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을 수 없다" 라는 구절과 어울리는 지친 세영이와 세영을 좋아하지만 건조하고 지친 여주 ... (안해주셔도 됩니다 항상 응원해요 공육님)


나는 유배되어 있다 기억으로부터 혹은 먼 미래로부터.

  TV에선 세영이 일요일 아침마다 챙겨보는 퀴즈쇼가 한창이었다. 흔히 ‘돼지 누린내’라고 불리는, 안데스테론에 반응하는 DNA가 무어냐 묻는 문제에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OR7D4'라는 답을 뱉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식탁 의자 끝에 한쪽 다리를 끌어안은 채 앉아있던 여자가 무심하게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그것은 정답이었을 것이다. 세영이 자신 있게 외친 것 중에 답이 아닌 것은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마치 추락이라도 하는듯한 TV의 종료음이 거실로 내려앉자 세영은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 여자의 뒤로 다가섰다. 그러고선 높게 올려 묶은 여자의 머리를 헤치고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춘다. 집요한 추적이었다. 세영도, 여자도 그가 무엇을 쫓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영의 추적이 귓불에 이르고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파고들자 여자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팔꿈치로 밀어냈다. 여자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세영은 여자의 뺨을 쥐어 자신을 향하게 했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세영이 그대로 입을 맞추자, 이번에는 여자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다만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팔을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세영은 눈을 떴다. 여자가 세영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오랜시간 핸드폰을 꺼놓았다 켰을 때 알림이 밀려드는 것처럼, 세영의 안에서 어떤 물음이 계속해서 울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 부터, 였을까?
  "슬슬 나갈 준비 해야죠."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여전히 세영을 똑바로 보고있었다.

  그러나 사람에게 유배되면 쉽게 병든다 그리고 참 아프게 죽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기서 참으로 아프게 죽을 것이다

  구내식당의 불고기 덮밥은, 아주 정직한 맛이었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그야말로 불고기 덮밥의 맛. '불고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고기 다시다가 들어갔음은 말할 것도 없을테지. 병원에서 파는 음식이라고  '건강한 맛'이 나는 것은 아니구나. 덮밥이 반도 넘게 남아있었음에도 여자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턱을 괴고 주변을 둘러본다. 점심시간을 약간 비껴 간 시간대였음에도, 식당 안은 자리를 메운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단 식당 뿐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동안 아파야만 하고, 그들이 아픈만큼 병든 이를 간호하는 이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병원 로비부터 수납창구, 대기실 밖의 진료 의자에 이르기까지 사람 그리고 또 사람으로 이어지는 무감하고도 길고 길고 긴 행렬.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온 것일까.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이 곳에 모이기 위해 타고 온 길의 시작은 어디일까. 그리고 또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는 걸까. 식당과 화장실에서 그 행렬만큼이나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그들을 안심시켜줄 것 같지는 않았다.
  "미안해요, 오래 걸렸죠? 식사는 같이 하고 싶었는데."
  세영이었다. 여자는 별 상관 없다는 뜻인지 어깨를 으쓱했다.
  "세란씨는 좀 어때요."
  이미 한 번 입원 치료를 받으며 퇴원수속까지 마쳤던 세란이었지만, 모진 환경 속에서 10년 가까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통 받았던 후유증은 그리 쉽게 가실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첫 입원 당시보다 심각하다면 심각한 상태였다. 주치의는 퇴원 시기를 확정할 수 없다는 말만 계속했다. 1년 하고도 또 봄과 여름이 흘러갔다. 매주 일요일, 그들은 병원에서 그들만의 주일을 보냈다. 1인 병실의 침상에서, 병원으로 향하는 고가도로 위에서 거창하지 않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소망을 흘리며. 그렇게 그들의 주일이 이어지던 와중에, 어느 순간부터 면회는 '가족'인 세영만 가능하다는 선고가 떨어졌다. 어차피 면회를 한다고 해도 세란은 약에 취해 자고 있는 일이 태반이었다. 세란의 상태가 더 나빠져 아예 면회가 불가능하게 되지 않음에 감사해야했다. 여자는 굳이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는 세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늘 그와 동행했다. 그의 곁에는 여자가 있어야 했다.
  "늘 그렇듯이, 잘 자고 있었어요."
  말하는 내용과는 달리 세영의 표정은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자는 자신의 확신이 오만이었음을 인정해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내려놓을 시기였다. 그런데, 무엇을? 하는 물음이 흘러나오지 못하고 여자의 안에서 그저 떠 다녔다. 오래된 물음이었다.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여자의 높은 구두 굽이 보도 블럭에 닿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세영은 그저 웃으면서 휘청이듯 뒷걸음질하는 여자를 따랐다. 거리에는 어둠이 내려앉은지 오래였지만 간판의 불빛들만큼은 꿈결처럼 선연했다. 점심은 같이 못 먹었으니까, 저녁 먹으러 갈까요? 간만에 데이트해요, 우리. 차창으로 스미는 가을 석양의 따가움에 세영이 한껏 인상을 구긴 채 던진 제안이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여자 또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향한 곳은 세란과 함께 셋이서 자주 가곤했던 피자펍이었다. 세영과 여자가 그토록 좋아해 마지않는 하와이안 피자를 주문하면 세란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게 맛있어?

  모든 나를 인정하는 순간이 올까? 목이 마르다고. 당신과 함께 사는 동안 여덟 번 말했다

  세란과 함께 했던 순간들에 대해 추억하는 동안 피자가 나왔고 그 때부터 여자는 연신 맥주를 마셨다. 그들이 주문한 피자에 하와이안 피자는 없었다. 여자가 생맥주를 연달아 여덟 잔 즈음 마셨을 때, 서버가 영업 종료의 시간을 알렸다. 세영은 눈만 끔벅거리면서 서버의 말을 듣고 있는 여자를 거의 부축하듯이 끌고 나온 뒤 차에 태웠다. 여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디로요, 집에요? 하는 세영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산책하고 싶어요" 하고 되풀이 할 뿐이었다. 세영은 집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댄 뒤 조수석의 문을 열고 여자의 손을 잡아 끌었다. 두 발이, 구두가 땅에 닿자 여자는 춤이라도 추듯 뒷짐을 지고 한없이 뒷걸음질 쳤다. 가볍지만 안쓰러운 걸음이었다. 세영은 그런 여자를 묵묵히 좇았다. 이윽고 정육점의 붉은 네온사인 앞에서 그들이 멈춰 섰을 때, 여자가 말했다.
  "다음 주부터는, 그러니까, 내가 세란 씨 면회를 할 수 있게 되기 전 까지는"
  여자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병원, 가지 않을까 해요."
  구내식당 밥, 역시 맛이 없거든요. 말을 하고선 여자는 뭐가 그리 웃긴 지 한참을 웃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쪼그리고 앉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기세였다.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세영은 여자에게 손을 내미려다가 그만두었다. 다만 새벽 바람이 많이 찼기 때문에, 외투를 벗어 여자의 어깨에 두를 뿐이었다. 세영은 언젠가부터 여자가 약혼 반지를 끼지 않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그것을 알은 체 할 수 없었다.
  다만, 그저 자신들이 제자리를 찾아 가기를, 가을 바람에 작은 소망을 태워 보냈을 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들이, 우리가, 서로를 마주하지 못하고 헤매게 된 것은. 언제, 부터, 였을까? 대답 대신 붉은 조명만이 껌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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