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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아, 교수님!

707×주인공


  남자는 늘 정시에 시보라도 울리듯 강의실에 들어왔다. 항상 손에는 커피나 확실히 콜라는 아닌 빨간 캔의 음료수가 들려있었고 가끔 두 개를 동시에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도 이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평소대로 방금 내려온 듯 하얀 김이 피어나는 커피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 선 최교수였지만, 강의실의 분위기는 확실히 평소와 같지 않았다. 남자는 강의실을 한 번 돌아보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만, 여러분."
  남자는 출석부를 집어들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늘 그렇듯 맨 앞에 자리한 여자는 그런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제 눈 앞의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좀 슬퍼지는군요."
  아직 개강 직후의 들뜬 공기가 가시지 않기도 했고, 벚꽃이 만개하여 이유없이 나다니기 퍽 좋은 날이긴 하였다. 하지만 이 처참한 출석률에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학교에 그 이름부터 대단한 배우, 'ZEN'이 CF 촬영을 위해 온 날이었다. 한 주 전쯤 부터 그가 온다는 소문이 캠퍼스 내에 파다하게 퍼졌고 뭇 여학생들의 기대도 그만큼 고조 되었던 게 사실이다. 당장 강의실의 풍경이 이를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이래봬도 저 최루시엘이 컴퓨터공학부 인기교수라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말이죠..."
  의기소침해진 교수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는 것인지, 여자는 고개를 강하게 두어번 끄덕거렸다.
  "아무리 교양이라고 하지만 말이죠, 너무들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고 잠시 말을 멈춘 뒤 수강생들을 한 번 죽 돌아보는 교수의 안경알이 빛나는 듯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의 성실성을 증명해주신 분들께는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추가 점수라도 주는걸까, 하는 기대가 담긴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빈 자리들을 채웠다.
  "물론 마지막까지 그 성실을 유지할 수 있냐는가에 대한 조건이 붙겠지만요. 역시 보상은 케이크가 좋겠죠."
  교수의 영문 모를 말에 모두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제대로 터진 모양인지 입을 막고 겨우 숨을 고르며 웃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맨 앞에 자리한 여자였다.

  그러나 케이크는 거짓말이었다.

  정보통신사회의 이해, 담당교수 Saeyoung L. Choi.
  교수의 이름도, 과목도 낯설기 그지 없었지만, 수강신청에 대참패한 여자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 뿐이었다. 이번 학기에 처음 개강하는 과목이라 이것이 과연 '만만한' 과목인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길은 전혀 없었다. 여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정보통신사회의 이해'를 시간표에 올렸다. 하지만 개강 첫 날, 강의실에 들어선 'Luciel Choi' 교수를 보자마자 여자는 내심 '정보통신사회의 이해'가 마지막 선택지로 남아있었던 건 어떤 우주적 존재가 자신을 최교수에게로 보내기 위한 큰 그림은 아니었을까 하는, 자기가 보기에도 약간 정신나간 것 같은 생각을 잠깐 했다. 교수는 붉은 머리에, 이른바 '옷걸이'가 되는 사람으로, 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 날이 더워져 감에 따라 교수의 소매 또한 걷어져 올라갔고, 여자의 시선이 그의 팔뚝을 따라 칠판의 끝과 끝을 헤맸다. 물론 그 헤매임 속에 여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바꿔 말하자면 교수를 열심히 바라봤다는 이야기이다. 간혹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여자는 '이보다 수업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하는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의 컴퓨터가 에니악이니, 웹의 시작은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효율적으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면서 부터라느니, 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고개를 열심히 흔들고 존경을 가장한 사심의 눈빛을 보내며 가끔씩 교수가 던지는 난해한 농담에 웃는 것만으로도 수업에서의 제 몫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느껴졌으니까. 적어도 중간고사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 여자는 생각했다. 늘 앞자리를 차지하고 수업 내내 목이 빠져라 교수를 좇아대는 자신을 교수가 성실한 학생으로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시험지에 자신의 성실을 증명하는 것은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엄습하는 불안감에 결국 계절학기 수강신청을 해 놓기로 결정했다.
  결국 종강의 때는 찾아왔고, 노트북에 '정보통신사회의 이해' 성적 확인 페이지를 띄운 여자는 좌절했다. 그리고 동시에 근거없는 배신감이 올라오는 것을, 화면을 바라본 채 천천히 느끼고 있었다. 여자는 새삼 계절학기를 등록했던 자신의 현명한 판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순간 자신에게 떨어진 날벼락 같은 철자 'D'를 향해 조의를 표해야 했을 것이다. 여자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교정에 발을 내딛자마자 캠퍼스를 바로 무대로 만들어 버렸다는 간증이 속출했던 ZEN의 그 촬영 현장에 자신도 갔었어야 했는데. 하는 괜한 후회를 뱉었다.

  6월의 마지막주, 또 다시 개강이었다. 계절학기가 시작됐다. 강의실에 들어선 여자는 꽤나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했다. 다들 어느 시점부터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목의 종강이 결코 달콤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자는 교수에 대한 원망의 앙금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였으나 그래도 여전히, 자연스럽게 맨 앞 줄을 차지했다. 최교수는 한결같이 강의 시간을 맞춰 들어왔고, 여자는 또 넋을 놓으려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재수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어이없는 웃음이 여자의 씁쓸한 감상을 비집고 올라왔다. 여전한 것은 최교수 뿐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느즈막이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선 여자는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무언가 발에 채이는 걸 느꼈다. 그것은 검고 얇고 판판한 모양새로 복도 바닥에 딱 붙어있었다. 본 지는 십여년도 더 된 물건인지라 이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한 것이 생소하였을 뿐, 여자는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디스켓?"
  대체 이런 걸 요새 그 누가 들고 다닌다는 말인가. 의문이 드는 와중, 여자는 한 일곱 걸음 즈음 앞에 '누가'에 해당 될 법한 사람 한 명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붉은 곱슬 머리의, 오늘도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말을 걸 용기가 쉬이 나지 않았다. 사실 강의실 밖에서 최교수를 보는 게 이번 한 번 뿐은 아니었다. 번번이 인사를 하려는 시도를 하곤 했지만, 그 뿐이었다. 강의실 안에서의 교수와는 판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장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밖에서는 더없이 단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문득 경영학과의 한주민 교수를 떠 올렸다. 지금의 최교수를 보고 있자니 '강의기계가 아니냐'는 평이 자자한 한교수가 온화해 보일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 구시대의 유물이 최교수의 물건임이 분명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여자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저, 루시엘 교수님?"
  최교수는 고개만 살짝 돌려 저를 부른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자신에게 꽂히는 교수의 금색 눈동자 한 쌍이 꼭 '무슨 일이길래 날 불러 세우기까지 하느냐' 하는 매몰찬 호통인 것 같아 괜히 침을 한 번 삼켰다.
  "이거, 떨어뜨리신 거 아닌가 싶어서요."
  여자가 최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검은 디스켓을 들이밀자 남자는 잠시 당황한 듯 여자가 내민 것을 보다가 "제 것이 맞네요. 감사합니다." 하며 그것을 건네 받았다. 굳어있던 그의 시선도 한결 풀어진 듯 해보였다. 최교수는 물끄러미 디스켓과 여자를 번갈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 수업 들으시죠?"
  예상치 못한 최교수의 질문에 여자는 눈만 깜박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재수강 아니신가요?"
  '재수강'에서 잠시 뜸을 들인 남자의 물음이 이어졌다.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딴에는 배려한답시고 넌지시 물은 것 일테지만, 그것이 되려 여자를 부끄럽게 했다. 여자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입을 뻐끔거리듯 네, 하고 대답했다.
  "흠, 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턱을 매만지던 최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가 꼭 여자를 놀리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어떻게 대꾸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도망가고 싶었다. 교수님을 보면서 제가 어떻게 잘 수 있겠어요, 하는 고백이라도 던져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정말, 정말로 고마워요. 나한테는 중요한 물건이거든."
  남자의 감사인사에 여자는 그저 고개를 꾸벅 숙일 뿐이었다. 그에 역시 목례로 답한 뒤 가던 길을 마저 재촉하던 최교수는 몇 걸음 지나지않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뒤돌았다.
  "또 앞자리 앉을거죠? 내일봐요."
  그럼 이만. 한 손을 쳐들고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최교수를 보며 여자는 이번 재수강도 과연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하는 한없는 의문을 품었고, 그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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