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엮는 일

꿈을 거니는 사람들

[707×주인공/인셉션AU] 2018.02.24 수상한 메신저 전력 60분 - 잠들 수 없는 밤


  “부탁하겠다는 사람들 태도가 어쩜 이렇죠? 오라 가라 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분 제자라는 걸 증명해 보이라고요? 이런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선 여자가 눈만 치켜 뜬 채 안경을 낀 남자와 갈색 장발의 남자 쪽을 바라보자,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그들 사이에 놓인, 드럼통 안에 지펴진 불만이 요란하게 타오르며 창고 안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여자가 나갈듯한 낌새로 창고 문 쪽으로 몸을 틀자, 그를 제지하려는 듯 장발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붉은 머리의, 안경을 낀 남자는 그럴 필요는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 그의 거동을 막아 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상황의 어색함을 느낀 것인지 품에서 무언가를 뒤지듯 찾아낸 여자가 곧 눈이 동그래져 멍해진 채 그들 쪽으로 돌아섰다. 여자의 손에는 십자가 모양의 작은 펜던트 하나가 들려 있었다. 손바닥에 놓인 펜던트의 중량감은 확실히 평소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는.

 

  “안녕, 가브리엘라 자매님.”

  개비Gabi라고 불러도 되죠? 장의자에 걸쳐지듯 누워있던 여자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이라도 칠 것 마냥 화들짝 놀라 눈을 뜨자, 여자의 머리맡에 서있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날래게 움직여 여자를 받쳐주었다. 여자는 고맙다는 말을 하며 반사적으로 가볍게 목례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턱을 괸 채 싱긋 웃으며 자신을 개비라고 칭하고 있는 뻔뻔한 남자의 낯짝을 보고서 자신이 감사나 전하고 있어야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는지, 팔꿈치로 남자를 밀어내고 금세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여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좀 전 창고에서의, 그러니까 에서의 일을 되짚었다. 왼 손목 정맥에 관이 꽂혀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분명 패시브PASIV가 남긴 상처일 테다. 아무리 새벽이라 사람이 적다고 해도, 이곳 수도자들의 조과朝課는 꽤 이른 시간에 시작된다. 여자를 에 들게 하려면 다른 이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엄지를 씹으며 상황 파악에 몰두한 여자의 머릿속 정도는 훤히 읽었다는 듯이, 남자는 성당 뒤편을 가리키더니 그쪽으로 손 키스를 보냈다. 키스를 받은 고참 수녀들의 깔깔대는 경쾌한 웃음이 새벽공기를 덮어, 높은 천장까지 닿아 고요한 회당을 울렸다. 여자는 말문이 막힌 듯 남자와 수녀들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수녀님들을 매수했어요?”

  여자의 진심이 담긴 의문에 남자는 목이라도 막힌 것처럼 끅끅대더니 손사래를 쳤다. 묵묵하게 저만치 떨어져있던 장발의 남자도 여자의 진지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살짝 어깨를 들썩였다.

  “이래봬도 제가 평소에 쌓은 덕이 좀 있어서, 도움 좀 받았죠. 저분들이 절 거의 키우다시피 돌봐주시기도 했고요.”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요점만 묻겠어요. 제가 그분의 제자라는 걸, 어떻게 알고 온 거죠?”

  남자는 말없이, 셔츠 목 부분 단추를 몇 개 풀더니 속에서 십자가 모양의 펜던트를 끄집어냈다. 바닥면에 ‘Luciel’이라 된 음각이 선명히 새겨진, 여자의 것과 똑같이 생긴 물건이었다. 여자가 아는 한, 이런 모양의 십자가토템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자신의 스승, 베드로 신부 말이다.

 

  “그러니까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추출자 ‘707’이 그쪽이라는 거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자는 그런 건 안중에 없다는 듯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신부님이 지나가듯이 말씀하셨던 첫 제자……도 그쪽이라는 거고……. 신부님 장례식에 이름 없는 근조화환을 보낸 것도 당신이군요.”

  “……찾아뵀어야 마땅하지만, 아시다시피 떳떳한 처지는 못 되는지라.”

  남자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신부가 남자, 루시엘을 공장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열일곱 즈음이라고 했다. 공장은 현실을 견디지 못해 꿈으로 망명한 이들이 모인 곳을 이르는 말이다. 모두가 같은 꿈을 꾸게 하고 그 안에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장치, 흔히들 드림머신이라고 부르는 패시브가 군에서 외부로 유출된 뒤로 무수한 공장들이 세워졌다. 당연하게도, 이는 금세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공장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들이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꿈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기 위해 공장장들에게 비용을 지불했으며, 때문에 빚더미에 나앉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들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납치를 당해 강제로 공장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공장은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마약사업이나 다름없었다. 패시브가 낳은 것은 이와 같은 폐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정의할 수도, 증명해낼 수도 없는 세계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기업들과 정치세력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다툼 또한 빈번히 일어났다. 각 분야의 거물들은 경쟁자의 기밀을 교묘하게 얻어내기 위해 추출자설계자라 일컬어지는 이들을 고용했다. 잠자리에서도 안식을 취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남자는 제 발로 공장에 걸어들어 간 경우라고 했다. 어린 나이에 정보조직에 들어가 해커로 일하며 그곳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나, 두고 온 가족이 못내 걸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다고. 그렇게 2년여를 꿈에서 헤매다가 교구차원에서 시찰을 나온 베드로 신부의 도움에 의해 가까스로 공장을 탈출했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루시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그는 그 길로 설계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장발의 남자는 정보원 시절의 동료벤더우드라고 했다, 후에 루시엘에 합류하여 팀을 이루게 되었다는 모양.

  “기껏 꿈에서 깼는데 또다시 꿈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하다니……. 이해가 잘 되질 않네요. 신부님이 뛰어난 설계자였던 건 맞지만……. 신부님은 어디까지나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셨어요. 그쪽을 산업 스파이나 되게 하려고 제자로 삼은 건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요.”

  “절 어떻게 평가하시든 상관없지만, 신부님 덕분에 여태 목숨 부지하고 살아 있는 거랍니다. 그분의 참된 뜻이야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신부님께서는 제가 살기를 바라셨고요. 꿈에서 살든, 깨든, 죽든. , 어차피 제 태생 자체부터가 모순이니까요.”

꿈에서는 모순도 진실이 될 수 있죠. 남자는 한마디를 더 덧붙이고는 씩 웃어보였다.

  “아무튼, 대체 저에게서 무슨 도움을 얻겠다고 이러시는 거죠? 저도 설계를 배우긴 했지만, 말 그대로 배우기만 했을 뿐이에요. 당신들과는 다르다고요. 기업을 위해선 일하지 않겠어요. 사람 잘못 찾으신 것 같네요. 그럼, 이만.”

  “아니, 개비. 잠시만요.”

  “그렇게 부르지도 마시고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여자를, 남자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누구의 이익을 좇으려는 게 아니에요. ……최세중, 누군지 알죠?”

 

  꿈의 세계의 설계란 기본적으로 현실의 설계와 다를 것이 없다. 다만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를 꿈의 무대로 만들게 되면 문제가 된다. 타깃은 물론, 추출자까지 꿈과 현실을 혼동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혀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이는 전적으로 설계자의 역량에 달린 일로, 지금의 여자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했다. 여자는 있는 대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것을 내뱉고는, 객실 입구부터 룸 안까지 죽 이어져있는 설계도와 작전 동선을 훑었다. 이미 패시브를 통해 몇 번이나 살피고 드나들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당장 내일이었다. 이 나라의 국무총리 최세중을 그들의 꿈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여자는 흘끗 침대 쪽을 보았다. 심란한 자신의 속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이 시간 즈음에 으레 그러하듯, 남자는 잠에아니, 꿈에 들어있었다. 협탁에 놓인 패시브가 남자의 손목에 약을 밀어 넣는, 윙윙대는 소리가 현관까지 들렸다. 저 남자가 국무총리의 사생아란 말이지. 여자를 찾아온 것은 총리 때문에 헤어지게 된 자신의 쌍둥이 동생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왜 자신은 선뜻 남자를 돕겠다고 했을까. 남자가 보수로 자신의 전 재산을 약속했기 때문에? 신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아니면, 그저 단순한 동정심에서? 이유야 어쨌든 때는 찼고,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이 제대로 맞물려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슬슬 벤더우드가 늦은 저녁거리를 사가지고 돌아올 시간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깨울까 하다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되뇌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만두었다. 저 웅얼거림이 어떤 고해와도 같은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의 꿈에 몰래 들어갔다 온 전적이 있다. 남자의 꿈은 매우 정교하고, 또 깊었다. 구름이 잔뜩 떠있는 하늘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무슨 실마리라도 되는 듯, 디스켓과 활짝 웃고 있는 소년이 담긴 사진의 무더기가 여자의 발길이 닿는 곳곳 놓여있었다. 꿈의 가장 아래층에서, 여자는 남자와 남자를 꼭 닮은 작은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웅크리고 앉은 채 팔로 다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남자는 아이에게서 반응을 바라는 듯 했다. 하다못해 원망이라도. 시간이 꽤 흘러 한 계절이 지나가는 데도 그곳의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저 남자만이 서성이고 울며 속죄할 뿐이었다. 꿈의 무딘 흐름 속에서, 남자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동안을 거슬러 온 것일까. 이 밤, 꿈에는 들었으나 잠에 들지 못한 이들이 있다. 여자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허리를 숙여, 남자의 머리칼을 헤쳐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불면자不眠者들을 위한 기도였다.


'엮는 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릴레이 연성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4) 2018.06.03
아무도 모르게  (0) 2018.03.17
Sugar High  (0) 2018.02.17
Caramel Colored 797  (0) 2018.02.11
거대충돌가설  (0) 2018.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