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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아무도 모르게

최세영×최세란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한다고 해서 의미가 있을까?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벌어져야만 했던 일. 꿈의 시작을 기억하는 이가 없듯이, 숨을 고를 수 있을 때가 오자 겨우 뒤를 돌아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세란은 눈을 감은 채로 이불을 끌어안고 있다가 서서히 눈을 떴다알람이 울렸다. 분명히 세영이 맞춰놓은 것일 테다. 부쩍 아침잠이 많아진 것 같다며 걱정을 하곤 했으니까. 그게 누구 때문인데. 세란은 미간을 찌푸린 채 팔을 있는 대로 뻗어 손바닥으로 시트를 휘저었으나, 손가락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돈되어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 세란은 비어있는 제 옆자리에 괜히 눈길을 두었다가 몸을 돌렸다. 눈이 부셨다. 건너편 건물에 반사된 햇빛이 베란다 창으로 그대로 들어와, 늦은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그 도화지 같은 흰 건물의 반사광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제의 기억이, 그리고 그간의 모든 일들이 흩어지는 것 같아, 세란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방 안의 아침을 들이켰다. 그러나 이 아침이 아무리 부시다한들, 감각의 선명함이 더 지나침을 알고 있다. 눈을 감지 않아도 쉽게 끄집어낼 수 있는 것. 아무도 모르게. 누가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속삭임과도 같은 말과 시작은 너무도 달아서, 쉽게 방심을 불러왔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 있겠어? 최세영, 말은 바로 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여기, 있는데.

  그래서 혀를 얽는 일 보다 안에 들이는 일이 이르게 된 것일까. 종아리에 그토록 알맞게 감기던 손바닥을 기억한다. 세영의 손은 어쩐지 차디차다. 눈시울이 붉어질 때 마다 와 닿던 검지만한 길이의 달램어쩌면 다그침을 밤이 지났다고 어찌 지워낼 수 있겠는가.

  처음으로 세영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을 때, 혀가 섞였다. 그 차고 마르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세란의 눈을 가리고, 어떻게든 형의 이름을 토해내려는 입술을 가르던 혀를 기억한다. 그것은 매우 뜨거워서,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혀를 얽으면서 서로의 이름을 묶어내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혓바닥 밑의 정맥들은 맞물릴수록 펄떡였다. 언젠가부터 세란은 세영이 눈을 가리지 않아도 눈을 감게 되었다. 대신 눈꺼풀에 조악한 바람과 다정을 새겼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위에 덮이는 온도를 느꼈다.

  여전히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세란은 침대에서 벗어나 베란다를 조금 열어둔 채 이불을 털었다. 핸드폰이 굵은 실로 성기게 엮인 러그에 엎어지듯 툭 떨어졌다. 세란은 바닥에 놓인 핸드폰의 액정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들고는 전원버튼을 길게 눌러 핸드폰을 아주 꺼버렸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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