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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릴레이 연성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릴레이 연성 1. 사랑이라는 것에 대하여] by.염(@yum89_7)님 : http://yyum897.tistory.com/5

[릴레이 연성 2. 그 여름날에 대하여] by.산(@aysid_mm)님 : https://san-mm.postype.com/post/1770626





707×주인공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아주 개운하다는 것이었다. 아니지, 어쩌면 이상할 정도의 개운함이 눈을 뜨이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슴푸레 방 안에 감돌던 빛들이 눈꺼풀 사이에 파고들어, 시야가 트였다. 뺨에 닿은 종이의 질감이 눅진하게 느껴진다. 그제야 책상에 앉은 그대로 잠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밖이 지나치게, 그리고 불안하게 밝다. 직감이 말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들은 좋지 못한 징조임이 틀림없다고. 아침이 밝은 것이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책상 앞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아 허겁지겁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알람이 울리기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 남아있다. 하지만 애매하다. 오늘 있을 쪽지 시험의 어마어마한 범위를 지금 와서 해치우기에는. 할 수 없이 가방을 꾸리기로 했다. 일단은 학교에 가는 게 상책이다. 책상에 올려져있는 교과서와 활짝 펼쳐진 채 침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공책과 여기저기 흩어진 필기구들을 있는 대로 쓸어 모아 가방에 담는다. 주변 정리를 끝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해가 완전히 솟은 모양인지 빛이 방 안에 그대로 들어 눈이 부셨다. 기지개를 있는 대로 펴며 일어나 침대와 바닥에 늘어져 있는 교복을 주워 입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도 벌써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은 역시 덥다. 그래서 하복을 입는다. 여름의 자락은 달력이 넘어가고도 느긋이 공기를 감고 있어서, 아침도 여태 이렇게 밝은 것이겠지. 창밖을 내다보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가방을 메고 나갈 채비를 했다. 시험 준비는 그곳에 가서 하면 될 것이다. 아마 세란이도 지금 즈음 집을 나서겠지. 어쩌면 이미 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 그러고 보니 토스트 싸는 것을 깜박했다. 준비할 시간 정도는 있겠지.

 

릴레이 연성 0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606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이제야 왔냐는 듯 세란이의 눈길이 와 꽂혔다. 하지만 아직 악보가 꺼내져 있지 않은 걸 보면 세란이 또한 이제 막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문을 꼭 닫고는, 단상에서 두 번째로 떨어진 줄의 좌석에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 낙차음에 세란이는 신경이 거슬렸는지,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눈만 흘긴다. 미안하다는 뜻으로 토스트를 꺼내들어 웃어보이자, 돌아오는 건 낮고도 진득한 한숨소리였다. 방해하지나 말라는 으름장 같은 그것 또한 웃어넘기며 나는 나대로 자리를 잡고 공부할 것들을 주섬주섬 끄집어냈다. 악보 뒤적이는 소리와 책 뒤적이는 소리가 금세 좀 전의 어수선함을 덮는다. 난색의 조명을 받은 채 업라이트 피아노를 앞에 둔 세란이는 퍽 진지하다. 건반 위에 드리운 그림자만큼 옅은 선율이 구관 시청각실을 맴돌았다. 약음 페달을 밟은 탓에 음은 희미할지라도, 소리가 가지는 박력은 한결같다. 해야 할 일은 잊은 채 토스트를 씹으며 세란이의 연주를 듣고 있으려니, 수업 시작 10분 전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려왔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신관에 제대로 된 음악실이 생긴 이후, 그 누구도 찾지 않게 된 구관 복도 끝의 시청각실에서 수상쩍은 회동을 가지게 된 것은 개학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아주 평범한 어느 날부터였다.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따라 나는 조금 더 빨리 집을 나섰을 뿐이고 세란이는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다. 매일같이 구관을 거쳐 등교를 하면서도, 그곳에 시청각실이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된 것은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떨어지듯 울리는 피아노 소리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조율되지 않아서일까. 음들은 어딘가 약간씩 빗나가있다. 그것에 맞춰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섰다. 단상 위에는 익숙한 옆모습을 한 채 피아노를 앞에 둔 세란이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피아노 소리가 잦아들었다. 8분의 3박자로 맞추어진 메트로놈의 바늘이 나와 세란이 사이의 정적을 오간다. 그렇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서로 바라보기만을 수분 째, 나는 가방을 뒤져 아침마다 늘 챙겨오는 토스트를 꺼내 세란이에게 내밀었다. 아침 먹었어? 아니 아직. 그럼 이거 먹어.

세란이는 아무 말 없이 토스트를 받아들었고, 이 암묵적인 계약을 계기로 낡은 피아노 한 대를 두고 이른 아침을 먹는 모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멋대로 이 모임에 조찬 클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란이는 모임의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묵묵히 피아노를 쳤다.

세란이는 내가 토스트를 챙겨오든, 피아노 치는 걸 마냥 구경하든, 연주를 들으면서 전날 끝내지 못한 숙제를 하건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걸었을 뿐이다. 자신의 형, 그러니까 세영이에게 이야기하지 않기. 그것이 전부였다. 마무리만큼은 혼자서 하고 싶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이유를 덧붙이며. 신경 쓰였지만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냥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두 사람의 친구이지만 동시에 형제의 친구이기도 한 나의 위치가. 알고 지낸 시간이 이제 그리 적다 할 수 없는데도, 이따금씩 어딘가의 언저리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을 느끼고는 한다. 그것은 요즘에 부는 바람과 닮아서, 마음 한 구석을 스치고 슬그머니 사라지고는 한다. 그래서 그저 납득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해를 수반하지 않는 납득. 완전한 이해라느니 하는 건 역시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찬 클럽’ 모임을 가진다는 사실은 오묘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입만 열면 비밀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그 세영이가 모르는 비밀을, 내가 가지고 있다승리감이 치밀어 오르면서도, 스스로가 유치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복도에 울려 퍼진 웃음은 조금 민망해서, 누가 보기라도 할까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윽고 다다른 교실 앞.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두 귀를 감싸는 손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나에게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니까.

최세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범인의 손을 털어내듯 뿌리치자, 익숙하고 능글맞은 웃음소리가 손바닥 대신 귀에 와 닿았다.

요새 들어 행차가 늦으시네요, 아가씨.”

그러는 너는 요새 웬일로 빨리 오는 것 같다? 시작종 칠 때 겨우 맞춰서 오더니.”

세영이는 부지런한 어린이니까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힐끗 돌아보자, 세영이는 손을 흔들면서 이미 자기 반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여간, 그 누가 사람 놀랠 때 귀를 막겠어? 보통은 눈을 가리지 않나. 세영이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어차피 상대는 뒤돌아있어서 자신을 보지 못 할 테니 아예 소리까지 듣지 못하게 귀를 막아버리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기막히게도 그럴싸해서, 결국 또 납득해버리고 말았다. 늘 그렇다. 세영이 앞에서의 나는.

이윽고 시작종이 울렸다. 아까의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아, 나는 자리에 앉아서도 괜히 귓바퀴를 문질렀다.

 

 

석식을 거르고 학교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기를 두어 시간 즈음 했을까, 숨 쉬는 것 마저 지쳐오기 시작해 교사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공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하고 있지만 학생들이건 교사들이건 모두 뒷마당이라고 부르는. 뒷마당에는 작은 벤치 몇 개와, 아주 커다란 거울 하나가 있다. 틀은 목재로 되어있고, 하단부에는 한없이 진지해 보이는 서체로 ‘25기 졸업생 동문 일동 기증이라는 금칠이 새겨진 거울. 이번년도에 졸업한 선배들이 50기라고 하던가. 반의 반세기 전에도 이곳에 학생들이 있었을 생각을 하니 왠지 애틋한 기분이 된다. 그때에는 다른 거울이 있었을까. 거울 앞에 서서 그 안을 바라보자, 일몰의 기운이 내려오는 모습이 비친다. ‘25기 거울은 원래 본관 중앙에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는 선배들의 소행인지, 뒷마당에 옮겨지게 되었다나. 벤치와 마주한 채 풀숲과 어우러진 거울은 꽤 운치가 있어서 점심시간이나 졸업사진을 찍는 시기에 특히 붐비고는 한다. 이렇게 혼자서 거울을 보러온 것은 처음이다. 이런 시간대이기 때문일까, 어쩐지 거울은 평소보다 더 거대하게 느껴졌다. 나는 선 채로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뒷걸음질 하여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벤치에 앉은 내 모습과, 그 뒤로 여전히 지고 있는 해의 모습이 거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석식도 거른 채 이렇게 때 아닌 방황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입맛이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침에 먹은 토스트가 얹힌 것인지, 점심 메뉴로 나왔던 스파게티를 너무 많이 먹은 것인지, 아니면 쪽지시험을 보란 듯이 망쳐버린 탓인지. 아무래도 시험 때문인 듯하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미리 해놨어야 할 것을 하루 밤 사이에 해치우려 했으니. 하지만 기운이 없다고 그냥 집에 가버리기엔 2학기부터는 야자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내 자신에게 열없어질 것 같다. 하기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야자도 떠밀리듯이 신청하게 된 감이 있다. 세란이는 잘 가라는 인사 할 새도 없이 피아노 학원 간다고 그러지, 세영이는 늘 그래왔듯이 세상 혼자서 바쁘니까. 1학기에는 그래도 셋이서 함께 하교하는 날이 제법 되었는데 말이다. 이런 상황이 되고나니 나도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역시 세영이에게 같이 공부하자고 했어야 되었던 걸까. 하지만 요 근래에 더 정신없이 바빠 보여서 말 건넬 틈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야자는 오늘을 제외하면 나름대로 성실하게 해왔으니, 너무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좋아, 그럼 다시 교실로 돌아가 볼까마음을 먹고 일어나려는 와중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울에 인영이 비친 탓에, 뒤를 돌지 않아도 인기척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세영이었다.

 

그 등장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는 잠시 동안 거울 안의 세영이를 바라만 보았다. 그런 나를 보는 세영이의 옆얼굴이 비친다. 그냥 다물고 있어도 살짝 올라가있는 묘한 입 꼬리 때문인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고개를 돌리려 하자, 익숙한 감각이 천천히 귓등에 내려앉았다. 이 저녁의 공기와 희미한 풀냄새와 가느다란 귀뚜라미 소리를 그러모으듯 내 두 귀를 감싸는 세영이의 넓은 손바닥과, 기다란 손가락. 우리는 이제 거울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세영이의 눈만이 빛나고 있다. 노을과 닮아있는 그 시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최세영이라는 세 글자로 한정된 가청주파수 안에 갇힌다. 손바닥 안의 소리는 한없이 가까워지다가도 다시 멀어졌다. 꼭 지구의 자전을 듣고 있는 것 같아. 어쩌면 바다 깊은 곳의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 맞닿은 손목과 관자놀이의 맥박들이 섞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을 뜨자, 거울 안에는 여전히 세영이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눈물이 차오른다. 당장이라도 어떤 말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이, 살짝 벌어진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자 요지부동일 것만 같았던 세영이의 입 꼬리가 무너졌다.

 

좋아해.

 

여전히 세영이가 내 귀를 감싼 채였지만, 오므려졌다가 서서히 벌어진 입술은 분명히 의미를 담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세영이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세영이의 얼굴이 내게로 와 떨어졌기 때문이다. 입술이 겹치자, 해가 완전히 주저앉았다.

 

 

.”

세란이가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있던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황망한 얼굴을 그대로한 채 세란이가 앉은 피아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신 칠래? 네 한숨으로 한 악장은 치고도 남겠다.”

내가 한숨을 쉬었어?”

어림잡아 30초 당 한 번 꼴로 쉬었어.”

그 대답에 나도 모르게 또 한숨을 쉬자, 세란이는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을 것만 같은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야 있지. 그냥 무슨 일 정도가 아닌 아주 큰일. 뒷마당에서의 일이 벌써 두 주가 더 되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난 후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말문이 막혀 눈길만 흩뜨리고 있자, 가만히 나를 보던 세영이가 집에 데려다주겠다 했던 것은 기억이 난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세영이가 교실로 가서 가방을 가져다주었고, 같이 교문을 나섰던 것 같다. 평소보다 느린 발걸음, 잔상 같은 가로수의 그림자들, 와중에 부지런하게 울려대는 핸드폰과 연락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나에게 집중하는 세영이의 태도, 그리고…….


손잡아도 돼?


은근하게 물어놓고는, 대답도 하기 전에 잡혀버린 손까지. 그렇게 손을 잡고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까지 갔었지. 대체 뭐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인 거냐고. 정정하겠다. 모든 것을 넘치도록 바르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문제다.

지난 14일여 동안을 세영이를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보냈다. 하지만 완벽하게 피해 다닐 수는 없어서, 잠깐씩 스칠 때 마다 꼭 내게서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것 같은 세영이의 얼굴을 맞닥뜨리곤 했다. 그렇지만,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대답을 들어야하는 건 암만 생각해도 내 쪽이었다. 그도 그럴게, 그걸 어떻게 고백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 그 입술이 벌어지는 모양을 읽었지만 들은 것이 아니었고, 보았지만 본 것이 아니었고, 거울의 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날이 어두웠다. 어쩌면 ‘25기 거울은 바라는 바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아니었을까? 어떤 마법학교에 있다는 거울처럼 말이다. 내가 본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르겠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세영이를 좋아한다는 것. 이 마음 하나로 충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벅차오르는 감정의 크기만큼 심지가 곧지 못했던 것일까. 역시 모르겠다.

머리를 싸매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으려니, 세란이가 혀를 차더니 다시금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세영이의 마음과는 달리 날이 갈수록 견고해지는 피아노 소리에 어쩐지 맥이 빠져, 한 번 더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 세란이? 연주회라고? 그래. 잘 다녀오고. 걔네 그러고 보니 요새 통 보질 못했네. 언제든 밥 먹으러 오라고 하고.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 갔다 올게.

주말에는 드러누워서 집에 박혀 꼼작도 않던 애가 어딜 기어나가는 거냐는 엄마의 궁금증을 풀어주고는 집을 나섰다. 원래도 열심이었지만 부쩍 연습에 매달리는 것 같아 콩쿨이라도 나가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며칠 전 세란이가 내민 것은 샛노란 봉투에 담긴 초대장이었다. 색연필로 삐뚤빼뚤하게 ○○ 피아노 학원 수료식 및 연주회라고 쓰인. 목표한 과정까지 레슨을 받고 그만두게 된 원생들을 위한 정기 행사라나. 초대장에는 마찬가지로 삐뚤빼뚤하게 이번 연주회의 주인공들로 보이는 열댓 명의 원생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중 우뚝 솟아있는 빨간 머리의 길쭉한 사람은 세란이인 것이 분명했다. 원생 친구들한테 꽤나 예쁨 받는구나, . 제법 잘생기게 그려놨는데? 깔깔대며 웃자,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세란이었다.

부지런히 발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세란이의 피아노 학원 앞이었다. 시계를 보니 시작 시간이 다 되었기에,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첫 원생의 차례가 시작되었는지 계단실을 타고 박수갈채 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사진 찍겠습니다.”

세란이는 찍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준비해온 꽃다발을 냅다 세란이 품에 안기고는 팔짱을 끼워 기사님 앞에 데려갔다.

언제 인화돼서 나올지도 모르는 걸 뭣 하러 찍어.”

뭐 어때 기념이지, 기념.”

어쨌든, 축하해! 손뼉을 세란이의 얼굴 앞에 들이밀고 마구 박수를 치자, 꼬마 원생 친구들도 모여들어 박수에 합류했다. 그제야 세란이도 웃어 보인다. 양 손에 들린 꽃다발과 수료증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세란이의 연주는 마지막 차례였다. 만족스러울 만도 하다. 족히 5분은 될 것 같은 길이의 곡을 막힘없이, 흘림 없이 쳐냈으니까. 아침마다 토스트를 조달해 간 보람이 있는 연주였다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이 자리에 세영이가 없다는 것. 주말인데도 그렇게 또 바쁜 걸까. 여태껏 세영이를 피해 다니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흘끗 세란이를 바라보니, 정작 오늘의 주인공은 의연해 보인다.

그럼, 축하의 의미로 오늘은 이 몸이 저녁을 사도록 하지.”

나 완전 비싼 거 먹고 싶은데.”

, 말만해. 가자.”

그래서 호들갑을 있는 대로 떨면서, 세란이의 손목을 잡아끌며 학원을 나섰다.

 

삼겹살로 배를 잔뜩 불린 우리는, 근처 공원을 산책 중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소화가 시급해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공원을 세 바퀴 정도 돌았을 즈음, 넌지시 세란이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이제 조찬 클럽은 어떻게 되는 거야, 해산?”

난 계속 아침연습 할 건데.”

그것은 예상치 못한 대답이어서, 세란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학원을 빨리 마치고 싶었던 거지 피아노를 그만두겠다는 게 아니니까.”

어차피 계속 칠 거라면 학원도 그대로 다니는 게 낫지 않아?”

세영이도 그걸 원할 테고. 하는 말은 나오지 못하고 도로 삼켜졌다. 세란이는 원래부터 피아노에 관심 많았어. 애꿎은 세영이의 목소리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제 우리도 곧 수험생이잖아. 그 전에 매듭을 짓고 싶었어. 혼자서.”

혼자서. 하는 말이 유독 곧게 느껴졌다. 그것이 어쩐지 쓸쓸해서, 결국 속에 있던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

……세영이는 왜 안 왔어?”

형한테는 말 안 했으니까.”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걸음을 그치자,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세란이었다.

그래도, 엄청 기뻐했을 것 같은데. 말했으면 분명 왔을 거야.”

그건 모르지. 알잖아, 형 혼자 바쁜 거.”

오늘 아침에도 어디 나가고 없던 걸. 대신 이거, 집에 가서 바로 보여줄 거니까. 수료증을 번쩍 들어 올리는 세란이었다. , 됐으려나. 지금의 세란이는 막 드러나지는 않지만 무척 기뻐 보이고, 수료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세란이가 피아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세영이 덕분인 모양이다. 세란이는 진심으로 피아노를 좋아하고 있구나.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다. 조찬 클럽 모임을 가진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말이다. 소리를 죽이기 위해 약음 페달을 밟아가며, 건반을 눌러 내렸던 손가락 하나하나가 여지없는 고백의 외침이었음을. 어째서 몰랐을까. 수료증만으로도 세영이는 전부를 이해할 것이다. 내가 세란이를, 형제를 알기 훨씬 전부터 봐왔을 테니까. 그 확실한 마음을.

바람이 어째 심상찮네.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그러게. 하는 세란이의 대꾸가 뒤따른다. 언제 저렇게 높아졌을까 싶은 하늘에는 적란운이 석양을 머금은 채로 잔뜩 피어있어서, 아주 선명한 분홍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곧 푸른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알게 되겠지, 세영이에 대한 내 마음을. 사실 이미 깨달은 것이나 다름없다. 세영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세영이를 좋아하고 있다. 아주 정말 많이. 그러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은 어제 내내 쌓아올린 구름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는지, 새벽부터 비를 쏟고 있었다. 간만의 비였다. 늦여름이 드디어 끝나려는 모양이다. 지금을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기에 이번 장마가 그리도 메말랐던 것일까. 아스팔트에 꽂히는 세찬 빗줄기 때문인지 넘쳐흐를 것 같은 심정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일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밤에는 잠들지 못했다. 덕분에 날이 밝을수록 또렷해지는 내 마음에는 닿을 수 있었다. 일찍이 교복을 갖춰 입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리 골목의 교차점에 나와 있으면서도, 우산에 가려진 세영이를 혹여나 놓치게 될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미리 문자라도 보내놓을 걸 그랬나. 그러고 보니 세란이에게 오늘의 조찬 클럽 모임에는 불참 하겠다 말하지 못했다. 내가 오지 않았다고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무척 세란이다운 반응인 듯해 쿡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볼까 싶어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우산 안으로 비가 너무 들이치는데다가 한 손으로 우산을 잡고 물 묻은 액정을 만지기가 영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세란이라면 늘 그래왔듯이 나보다 먼저 학교에 가있을 것이 빤하다. 그럼 세영이랑 세란이는 원래 같이 등교하지 않는 건가? 2년 간 꽤 붙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것 같다. 아무렴 어때. 전만큼 갑갑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내온 시간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담 너머 나란히 붙어있는 집들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넋 놓고 보기도 하고, 코부터 서서히 젖어오는 운동화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요동치는 맥박을 진정시켜보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우산도 없이 뛰어가는 아주 잘 알고 있는 뒷모습이 저 앞에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이름을 외쳐 그 모습을 불러 세웠다. 최세영, 하고. 곧고 뚜렷하게. 거센 비 따위가 내 목소리를 막아 세우지 못하도록. 우뚝 멈춰 선 세영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날이 많이 서늘해진 탓일까, 세영이의 어깨에선 흐릿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세영이 앞에 다가선 나는 팔을 올려 그 위에 우산을 씌웠다. 안경알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어서, 앞이 제대로 보이기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우산을 잡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안경을 벗겨, 가디건 소매 끝을 당겨 잡아 세영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우산도 없이 뭐하고 있어. 다 젖잖아.”

세영이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걸, 뭐 상관없나. 나랑 같이 쓰면 되니까. 하고 도로 그 입을 막아버린다.

세영아. 이번에는 빗소리도 그 누구도 아닌, 세영이만 알아들을 수 있게 이름을 속삭이자,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세영이의 상체가 살짝 기울어졌다.

, 내심 생각하고 있었어. 세영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 아닐까 하는 생각. 솔직히 거의 확신했어. 그런데 무서웠어. 내가 먼저 말해버리면 모든 게 무너져 버릴까봐. 잃게 될까봐. 뭣 땜에 왜 그렇게 맨날 바쁜지, 핸드폰 알림은 왜 쉬지 않고 울려대는지……. 나는 몰라. 너를 다 알지 못한 채로 좋아한다는 게 겁났어. 그렇지만,”


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제대로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너도 나와 같다면.


자꾸 울먹이게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겨우 들어 세영이의 눈을 바로 보았다. 세영이의 입꼬리가 무너졌다그러나 전과 같지 않게그지없이 분명하게.

 

, 나도 널 좋아해.


한참을 돌아왔지만, 그 여름날을 지나 결국 마주하게 되는, 사랑이란 것에 대하여.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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