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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눈물에는 중력이 필요하다

707×주인공

 

 

  하늘에서 별이라도 떨어지고 있는 줄 알았다. 이 세상과도 작별이구나. 드디어. 그래, 안녕. 팔뚝으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리다 눈을 떠보니 현관 바닥이었다. 시야를 파고든 것은 별이 아니라 고장 난 센서 등이었다. 깜박. 깜박. 등에 맞추어 무슨 술래잡기라도 하듯이, 불이 켜지면 팔뚝으로 눈을 가렸고, 꺼지면 다시 팔을 거두었다. 그 짓을 몇 번 하다가 힘에 부쳐, 결국에는 팔을 늘어뜨리고 송장처럼 누웠다. 타일 바닥의 냉기가 온몸을 채워 누르고 있음을 그제야 느낀다. 눈이 부신 게 문제가 아니었다. 경기라도 일으킬 듯 근육이 헐떡였지만 비명은 지르지 못했다. 미처 닫히지 못한 입술 사이로 입김만이 샐 뿐이었다. 벌떡 일어날 기운은 없었기에 현관 바로 근처에 있는 욕실 문턱을 기듯이 겨우 넘어, 욕조에 몸을 던졌다. 되는대로 온수 쪽으로 손잡이를 꺾어 물을 트니,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내린다. 젖은 원피스 자락이 내려앉아, 수채 구멍에 흘러가는 물의 흐름에 넘실거렸다. 젖어 붙은 옷의 윤곽 위로 곧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또 잠에든 모양이다.

 

  짧은 꿈을 꾸었다. 다정한 꿈이었다. 흐릿했지만 익숙한 형태와, 온기와, 사소함으로 이루어진 꿈. 분명 그 사람이었겠지. 나의 꿈은 주로 허무했으나 이따금씩 그가 찾아들 때면 모든 것이 가득 차 무너져 내리곤 했다. 그러면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되었다. 어쩌면, 그가 내 꿈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수증기는 여전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짙은 녹색의 원피스는 적셔져 검어지다 못해 몸을 휘감은 수렁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물을 잠그고 천천히 일어나 욕실을 나섰다.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일출인지, 일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아파트 단지 중간에 걸린 해가 끈질긴 자국을 카펫에 혓바닥처럼 길게 늘여내고 있을 뿐이었다. 해가 지나갔을 자리마다 삶의 증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베란다를 등지고 그것들 사이에 섰다. 옷가지며 쓰레기며 하는 것들에 원피스 자락에서 떨어진 물이 툭, 툭 소리를 내며 흔적을 새겼다.

  내가 밟고 선 것들은 꿈은 잔해. 그 잔해란 것들은 그런 모양새였다. 나의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다가, 곧 집 안 전부를 메웠다. 밤이었다.

 

  옷은 마를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저 주변을 적실뿐이었다. 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상태로 카펫을 배회하다 보니 어느덧 세 시였다. 언제부터였는지 또 왜였는지는 몰라도, 널브러진 것들을 한데 끌어 모아 주변에 쌓다 보니 성이 되었다. 이미 집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몇 달의 무덤과도 같은 옷 더미를 넘어, 베란다로 향해 먼지 쌓인 카트와 여행 가방을 있는 대로 끄집어냈다. 그나마 부피가 덜한 것들을 위주로 모아 넣었는데도 가방 세 개가 그새 다 찼다. 할 수 없이 담지 못한 것들을 구석으로 밀었다. 그러곤 바로 카트를 끌고 나서려다가, 마찬가지로 널브러지긴 했지만 입을 수 있을 법한 외투를 하나 집어 걸치고 늘 신던 스니커즈에 발을 구겨 넣었다. 현관을 열자―당연하지만―밖은 어두웠다. 카트가 복도 위를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람들이 깨기라도 하면 어쩌지. 답지 않은 걱정을 한다. 정확히는 깬 사람들이 나에 대해 수군댈 것에 대한 걱정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게 요 몇 달 간을 작은 복도식 아파트 어느 한 칸에 의지해 숨어 지내온, 수년간 함께 지낸 남자가 떠난 후 혼자가 된 한 여자를 두고 수근 댈 것에 대한 걱정 말이다. 낮은 스니커즈 위로 드러난 발목이 시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사람이 곁에 있을 적만 해도 시린 줄을 몰랐던 발목이었는데.

 

  바깥은 고요했다. 꼭 어떤 캐럴의 가사와도 같이. 거룩한 밤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응달이 지는 곳을 따라 얼어붙은 길바닥을 타고 번지는, 이미 문을 닫은 지 한참 되었을 가게 창에 매달린 줄 전구 불빛만이 성탄 전야임을 알리고 있었다. 카트 바퀴가 그 위를 흐르듯이 지나쳤다. 그렇게 밤길을 배회하며 막무가내로 당도한 곳은 '세영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24시간 코인 빨래방이었다. 자주 지나다니기는 했지만 딱히 올 일은 없었던 곳. 흔한 세탁소 이름이었다. 洗靈社가 아니라 Saeyoung社였다는 점만 뺀다면. 하기야, 코인 빨래방에 '영혼까지 씻어주는' 같은 수식어가 붙는 것은 영 어색한 일이겠지. 여느 가게들과도 같이 모든 불이 꺼진 채 네온사인으로 된 간판만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지만, 주저 없이 문을 밀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문은 열려있었다.

내내 밤길을 헤쳐 온 덕분인지는 몰라도, 불이 켜지지 않은 빨래방 실내에는 별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어둠을 더듬어 가게 한가운데에 있는 평상을 찾아내 걸터앉아 숨을 돌린다. 그러고 보면 간판 불만 들어와 있지, 성탄을 기념하기 위한 그 어떤 물건도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본격적이지는 않아도 구색 맞추기로 하나씩은 대충 걸어놓는 줄 전구마저도. 바깥에서 희미하게 스며든 불빛에 떠다니는 먼지가 반짝였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이 5평 남짓 되는 공간이 진공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원피스 자락도 더 이상 내려앉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마르지 않은 채였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새벽 어스름이 빨래방 언저리를 훑었다. 벽면에 죽 늘어선 세탁기들의 윤곽이 그제야 드러났다. 평상에서 일어나 저만치에 우두커니 서있는 카트를 끌어와, 옷가지가 담긴 가방들을 하나하나 바닥에 내렸다. 빨래를 다 넣어 돌리고 보니 한 벽면의 세탁기들이 전부 돌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 아침이 밝아있었다. 완전한 성탄의 날이었다.

 

  세탁이 거의 끝나갈 즈음, 그러니까 탈수가 진행되고 있던 참이었을까. 난데없이 빨래방 문이 벌컥 열렸다. 나가서 간단한 아침거리라도 사 올까 고민을 하던 나는 문간에 선, 문을 연 이라 추정되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품이 낙낙한 스웨터를 뒤집어쓰듯 걸치고 있던 남자 또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세탁기들을 보더니, 다시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세탁기가 탈수를 하면서 만들어내는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흐름에 맞추어, 원피스 자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소리가 시선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남자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가게로 들어와 혼 쪽 벽의 손잡이가 없는 문―있는 줄도 몰랐던―을 밀어 창고로 보이는 공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언가를 찾는 모양인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탈수음에 박자를 얹었다. 이윽고 세탁기들이 차례로 빨래를 끝냈고, 남자 또한 무언가를 손에 든 채 다시 나타났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내 앞에 서더니, 그것을 슥 내밀었다. 옷이었다. 흰 셔츠와 면바지였다. 척 보기에도 여자 옷은 아니었다. 그래도 얼추 맞을 것 같은 옷을 내온 것 같았다. 역시 내 꼴 때문이겠지. 그러나 빨래의 건조만 끝난다면 이 곳에서의 볼 일은 그만이었기에, 사양하겠다는 뜻으로 얼굴은 들지 않은 채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지만 반듯하게 개어진 옷들은 물러가지 않고 여전히 눈앞에 들이밀어져 있었고, 남자의 귀찮은 듯한 한숨 또한 그 위에 얹어졌다. 영문을 모르겠는 채로 얼굴을 들어 남자를 보자, 남자는 한숨을 한 번 더 쉬더니 짜증난다는 어투로 툭 말을 뱉었다.

 

  "여기저기 자꾸 물 흩뿌리지 말고 빨리 받아 입어요. 남의 영업장에서 뭐하는 거예요, 지금."

 

  어디 가서 갈아입으라는 거냐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남자는 턱짓으로 좀 전의 창고를 가리켰다.

 

 

 

 

  옷에서는 마른 냄새가 났다. 남자와 닮은 냄새라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서니 남자는 대걸레로 바닥을 미는 중이었다. 웅얼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세탁기가 아직도 돌아가고 있나 보다 싶었는데, 가만 듣고 보자니 남자가 알 수 없는 곡조를 흥얼거리는 소리였다. 내가 나왔다는 것을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세영 씨.

 

  나의 부름에, 흥얼거림이 먼저 멎었고 뒤따라 남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남자가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뒤를 돌았기에, 간판에 써져있잖아요. 하고 답했더니 알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흔든다. 남자는 다시 청소에 열중했다. 그 뒤를 꼬리잡기하듯 뒤따라, 싱겁게 말을 건네 본다.

 

  옷은 고마워요. 고마우라고 준 거 아니에요. 정 고마우면 청소라도 하시던가요. 이미 하고 계시잖아요. 그럼 빨리 세탁물 챙겨서 가세요. 오늘 영업하는 날 아니에요. 24시간 영업이라고 되어있는데요? 문도 열려있었고요. 문은 원래 열어놔요. 그리고 그 밑에 써져있는 거 자세히 안 봤죠? 연중무휴. 단, 12월 25일 제외. 아, 그러네. 근데 왜 하필 오늘이에요? 글쎄요, 그쪽이 굳이 오늘 빨래를 하러 온 이유랑 비슷하겠죠.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이유냐고요. …이거, 젖은 옷은 서비스로 빨아 드릴 테니까 며칠 뒤에 찾으러 오세요. 말 돌리기예요? 좋아요, 어쨌든 오늘 영업 안 하는 거 맞죠? 청소 끝나면 밥 먹으러 가요. 제가 살게요.

 

  질린 건지, 체념한 것인지, 남자에게서 그러죠. 그럽시다. 하는 항복의 선언이 떨어졌다. 이런 성탄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나날이었다. 그 무엇도 나를 지탱해주지 못해, 그저 아래로 또 아래로 떨어지고 흘러내리는 나날들. 그래서 그 무엇도 나를 끌어내리지 않는, 무중력의 저 우주로 도망치고 싶던 나날들. 그러나 세탁과 눈물을 위해서는 중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왜인지 남자와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길게 나눌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근거 없는 확신이 들어, 나는 계속해서 남자의 뒤를 좇았다. 남자는 더 이상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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