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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맹점

707 배드 2 이후

수상한 메신저 전력 60분 2018.06.30 - 목소리



막막한 밤이었다.

세영은 속옷 하나 입지 않고 겉옷만 어깨에 걸친 채 시트에 기대어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느슨하게 올려 묶은 탓에 옆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었지만, 달빛 한 줌 떨어지지 않는 새벽이기 때문인지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좀 전만 해도 세영에게 매달려 열에 받친 신음을 토하던 여자의 가쁜 호흡은 그새 관계의 흔적을 지워내기라도 한 듯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억새밭의 바람이 여자의 숨을 훔쳐낸 것일까. 타액으로 젖어 달뜬 입술만이 지나간 정사情事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바람이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지만, 차 안의 공기는 일을 치러낸 후의 나른함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팽팽하게 조여져 있었다.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분위기의 갑갑함에 짓눌려 세영은 평소에는 쓸 일도 없는 시가 라이터를 뽑아 괜히 만지작거렸다. 벤더우드가 동승했을 때 이따금씩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세영은 희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것을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도로 꽂아 넣었다. 여자는 이제 두 다리를 올려 감싸 안고 있었다. 무릎에 놓인 손가락 끝의 칠이 거의 다 벗겨져 있었다. 여자의 호흡은 그새 더 잦아들어서, 숨을 쉬고 있기는 한 건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요 며칠 여자는 부쩍 말수가 줄었다. 오피스텔을 나서 무작정 차를 몰아 달린 것이 어느새 한 달 째, 여자는 잔뜩 들떠 조잘거리다가도 없는 사람처럼 가라앉고는 했다. 지금 여자의 모습처럼. 거북한 침묵에 세영은 라디오라도 켜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여자와 떠나온 뒤로 라디오를 들은 적이 없다. 당장 그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에 취해있기도 했지만 실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래도 모르겠어?

 

세영 주변을 맴돌던 환청이 당장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았기에. 그러나 환청은 이미 실체였다. ‘세란이라는 이름을 하고 세영과 아주 닮은 모양을 하고 있는. 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여자의 존재가 오히려 허상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낱 전기신호의 주고받음에 불과했던 여자와의 연락들은 그렇게도 명백한 형태를 하고 세영을 헤집어놓았었는데.

여자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창밖으로 그저 팔을 뻗고 있었다. 세영은 아주 몸을 돌려 여자를 보다가 그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세영에 맞추어 헐벗은 몸이 흔들렸다. 때문에 어깨에 걸쳐진 겉옷이 떨어지자, 여자는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세영은 어깨를 붙잡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가, 힘을 주지 않고 여자의 목에 손바닥을 감았다. 세영은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그저 여자의 입이 열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손바닥에 떨림이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여자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세영을어쩌면 그 너머를 응시하다가 목에 감긴 세영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걷어냈다.

 

산책 좀 다녀올게요.

여자는 시트 아래에 흩어져있는 속옷을 주워 입고는 차를 나섰다. 여자가 일어서자, 헐겁게 묶여있던 머리가 길게 내려와 풀어졌다. 억새밭에 섞여든 여자는 앞으로 가다가도 곧잘 뒤를 돌아보았다. 세영은 신발이라도 신고 나가라고 외치려다 그만두었다. 날은 여전히 어두웠고, 여자의 모습은 세영의 시야에서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