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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이 메일에는 본문이 없습니다.)

구부정히 목을 죽 뺀 채로 키보드만 몇 시간을 내리 두드리던 남자가 급정지하듯 자세를 바로 고쳐 앉은 것은 새벽 네 시 십구 분 즈음이었다. 업무의 관성에서 미처 헤어 나오지 못한 남자는 멍하게 모니터 위의 허공을 올려보다 자신이 멈춰 선 이유를 상기해냈다. 난데없이 울린 알림 소리 때문이었다.

 

(이 메일에는 본문이 없습니다.)

 

'707'RFA 메일 계정으로 여자가 보낸 메일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초대 담당자가 보낸 것이란 말이다. 공허하게 울려 퍼진 알림은 며칠 전에 불쑥 나타난 여자의 존재만큼이나 생경했다. 남자는 메일수신함 최상단에 올라와있는 굵은 글씨의 새 메일의 제목에 커서를 올려둔 채 화면을 훑어 내렸다. 4년 전 RFA 설립 당시부터 리카와 나누었던 메일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잊고 지냈던지내야만 했던 것들과의 격조였다. 자신의 계정이지만 얼마 만에 접속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리카가 떠나고 난 이후로 접속한 적이 없다는 것. 하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메일 기능은 애초에 리카를 위해 자신이 만들어준 것이었고, 남자는 보안담당자로서 그녀에게 협조해야 했으니까. 리카가 없는 한 아무 의미도 없는 기능일 뿐이었다. 적어도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남자와 메일을 주고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여자는 느닷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초대 담당자의 업무나 착실히 해나가면 그만이다. 수신메일함 저 바닥에 가라앉아있는, 기밀사항이니 특수보안장치니 하는 것들을, 여자는 당연히 알 리가 없겠지만, 알아서도 안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여자가 있는 오피스텔에 이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남자는 급격하게 허기가 지는 것을 느꼈다. 일단 뭐라도 입에 욱여넣어야 할 듯 했다.

 

남자는 전자렌지에 대충 돌린 탓에 아직 해동되지 않은 채 군데군데 딱딱하게 굳어있는 인스턴트 핫도그를 접시에 내어 모니터 앞에 돌아왔다. 저 구석에 잔뜩 쌓인 채 냉동고에 박혀 유통기한을 넘기지나 않았는지 모를 그것들은 한창 업무가 몰렸을 때 벤더우드가 사다 쟁여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눅눅한 냉기가 박힌 핫도그에 대충 케첩을 뿌려 우물대고 있자니, 본문 없는 메일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여자도 아직 깨어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 시간이 너무 맹랑하다. 조금 전에 유성과 젠이 떠들어대던 채팅방에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잠결에 잘못 보낸 것이리라. 한창 게스트 섭외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양이었으니, 메일을 열어둔 채 잠에 들었을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이 들어 납득됐다. 남자는 별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피스텔 현관 앞의 폐쇄회로 화면을 살폈다. 당연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면에 덮여 자글거리는 것이 노이즈인지, 남자의 심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가 있는 오피스텔에

폭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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