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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저 들 밖에 한밤중에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18:21-22)

 

막상 날이 닥치자 사건은 낱낱이 흩어진 웅성거림으로 내려앉았다. 첫눈이 올 거래. 겨울 초입의 어느 날 거리 위를 거니는 사람들의 사이사이로 옮겨지고 이어진 기대처럼. 그러나 그날 결국 눈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세란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밤에 아기 예수가 온다고.

늦은 오후의 성당은 아직 한산했다. 젊은 보좌신부가 사목회장이니 상임위원회장이니 거창한 이름을 달고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노인네들과 함께 인근 산에서 구해온 나무로 트리를 세우고 있었다. 깨끗하게 잘려나간 몸통을 보고 있자니 산 어딘가에 덩그러니 남겨졌을 밑동에 생각이 가닿았다. 남겨진 것은 떠난 것이 돌아오기를 기다릴까. 아니면 남은 겨울을 세고 세다가 새 가지를 뻗어낼까. 마른 흙에 박힌 뿌리의 선택이 어쩔는지는 몰라도, 구세주를 위해 희생당한 나무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태워지거나 성당 뒤편에 버려진 채 수거될 날만을 기다리게 될 것이 뻔한 운명이었다.

세란이 딴 생각에 몰두하는 동안 트리가 다 세워진 모양인지, 보좌신부가 사다리에 올라 꼭대기에서부터 줄전구를 드리우고 있었다. 언제 온 것인지 지현이 사다리 아래에서 전구를 받아 트리 꾸미는 것을 돕고 있다. 빤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세란을 보며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사목회장과 상임위원회장도 힐끗 세란에게 눈길을 던지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원체 정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들이긴 했지만 엄마라는 여자가 죽고 난 뒤에는 세란을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주보의 부고 란에 실리지도, 장례미사에도 오르지 못한 죽음이었다. 결국에는 뻔뻔하지 못해 그런 것이겠지. 세란은 생각한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찌 되었든 엄마의 죽음은 숨통을 터주었고 자신이 있을 곳은 이 곳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저것은 저 사람들 나름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싶을 뿐. 어차피 엄마는 신자도 아니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에게도 의미를 둘만한 죽음은 아니었다. 떠벌려서도 안될 죽음이기도 했다.


세란은 안뜰로 걸음을 옮겼다. 세란 혼자였지만 낙엽마저 밟히지 않는 깨끗한 정원을 보고 있자니 겸연쩍어졌다. 이 계절에는 도통 적응할 수가 없다. 겨울의 하늘은 대개 비누를 풀어놓은 양 부옇기만 하다. 모든 것이 시들고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세영이 훌쩍 떠난 것도 늦은 겨울이었다. 성당에 오게 된 것 또한 겨울이었다. 모든 일이 이 계절의 시작과 끝에 있었다. 지겨웠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듬성듬성 섞여있는 빈 화단을 바라보며 걷고 또 걷고 있자니, 입구 쪽이 소란스러웠다. 리카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중고등부 부원들이 하교하자마자 성당으로 온 모양이었다. 둔탁하면서도 미끈거릴 것만 같던 하늘은 어느새 먼지구름 안에 분홍색 저녁놀을 품고 밤 속으로 가라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퇴근을 앞둔 신자들도 맡은 일을 위해 속속 모여들어 앞마당이 자가용으로 가득찰 것이다. 그렇게 곧 다들 한 데 앉아 식사를 하고, 거룩한 밤을 맞을 준비를 하겠지.

 

"많이 먹어. 꼭꼭 씹어서. ?"

세란아, 하고 부르며 식사를 받아 자기 옆으로 온 리카였다. 넘기지 못한 만두 탓에 입을 열지 못하고 꾸벅 숙여 인사를 하니, 리카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기 몫의 만두를 하나 내어준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황급히 손을 저어보였으나 리카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성호를 그을 뿐이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만둣국을 앞에 둔 리카의 나직한 읊조림을 듣는다. 크리스마스와 만둣국이라니. 실로 어색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조금은 우습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추운 밤, 뜨거운 국물이 위장에 드는 것만큼 뿌듯한 일이 또 있을까. 자정이 넘어서까지 진행되는 미사를 견디려면 만둣국으로도 부족하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자모회원들이 큰 솥 여러 개를 두고 어묵을 삶고 있었다. 저녁 배식이 막 끝났는데도, 어쩌면 저렇게 부지런할 수가 있는지. 의미를 모르겠지만서도, 실로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꼬치에 꿰인 어묵은 국물과 함께 종이컵에 담겨 미사를 끝내고 예배당을 나서는 모든 이의 손에 하나씩 쥐어질 것이다. 유치부 아이들은 산타클로스 분장을 한 지현의 커다란 꾸러미에서 나오는 선물을 받아갈 것이고, 지현은 그걸 또 사진으로 찍어 남기겠지. 모든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그도 그럴 게 벌써 세 번째 성탄이다. 성당에서 맞는, 세영 없이 맞는.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성탄.

"……세란이도 이제 중고등부 졸업이네?"

그런 속내를 읽은 것인지, 한데 모여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는 고3 아이들을 힐끗거리던 리카가 운을 띄운다. 세란은 숟가락으로 국을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성당은 계속 나올 생각이니?"

세란은 대답 대신 리카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어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스물을 앞둔 세란의 속에 분명하게 돋아나는 것은 세영을 찾고 싶다는 바람 하나뿐이었다. 겨울이 깊어지고 하늘이 얼어붙을수록 밝고 진득하게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던 그 온전한 별처럼 마음속을 돌고 돌아서 그렇게.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공부하던 거 계속 하면서 일도 찾아보고……"


그리고

형을 찾고 싶어요.

 

목젖마저 넘지 못해 속삭임조차 되지 못한 마지막 마디의 입술을 읽은 것인지, 리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빈 그릇으로 눈길을 돌렸다.

 

 

잠시 후 성당 내 불이 소등되면 복사단과 성체분배자 그리고 사제께서 입장하십니다.

구유예물은 미리 준비하셔서 경배하러 나오실 때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성탄전야미사의 시작을 알리는 해설자의 안내가 회당 안으로 울려 퍼지자, 첫눈을 소망하는 듯 수군대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진공 같은 고요함만이 감돌아, 이내 불이 꺼진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난 4주간 동안 구세주의 탄생을 준비해왔습니다. 오늘은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날입니다.

 

모두 일어서십시오. 침묵 가운데 말씀이시며 참빛이신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입장하는 사제를 맞이하겠습니다.

 

거룩한 밤을 맞기 위해 모인 모든 이가 제대의 저 반대편에 있는 사제를 향해 돌아섰다. 향과 십자가와 초를 들고 마리아, 요셉을 받든 복사들과 분배자들 뒤로 주임신부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를 본다. 아주 천천히, 구유를 향한 행렬이 시작된다. 성가대의 합창이 그 뒤를 따른다.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선두에 선 복사가 분향하자 속을 파고드는 알싸한 연기가 자욱하다. 그 기운에 감싸여, 초에 매달린 불빛만이 어스름히 사람으로 오신 주, 아기 예수의 얼굴을 비춘다. 마치 베들레헴의 별처럼.

 

천사들이 전하여 준 주 나신 소식 들었네

 

행렬이 구유에 가까워져, 자신들의 근처로 사제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제대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세란은 자세를 낮추는 척 하다가, 주변을 한 번 살펴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성탄이 지나고 땅이 풀리면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하신 구세주를 기리려 삼숙하고 회당 안의 불을 끄고 서로가 서로의 초에 불을 옮겨 붙이고 우리의 지은 죄를 참회하며 부활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성탄을 맞겠지. 여태껏 그래왔듯이. 그렇지만 세란은 어쩐지 이번이 마지막일 것만 같았다. 크리스마스 뿐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이 다. 그래서 두 눈으로 똑똑히 새겨두고 싶었다. 구유에 놓여 탄생을 맞이하는 아기 예수의 모습을.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이윽고 마구간에 불이 들어왔고, 세란은 눈을 감았다. 예수가 정말로 그들 중에 임한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닳은 소매를 숨길 수 있는 어둠 속에서만큼은 안녕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저 들 밖에 그리고 저들 밖에 한밤중에

외따로 떨어져 배회하고 있을지 모를 누군가에게도 오늘 밤에는 평화가 깃들기를. 비누가 잘 풀어지는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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