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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는 일

Midnight City

 

707×주인공

 

  

  세영은 연신 기침을 해대며 바닥에 박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반동 때문인지 머리카락 한 올 찾아볼 수 없는 기판 위에 소금기 섞인 흙먼지가 우두두 떨어졌다. 세영의 터럭수염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먼지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인지, 세영은 주머니를 뒤져 껌 하나를 꺼내 씹고는 묵묵히 등대의 시스템을 구동시켰다. 마지막 껌이었다. 이런, 다음 보급품이 오려면 좀 기다려야 되는데. 듣는 이 없는 푸념을 웅얼거린다. 이런 저런 버튼을 누르고 레버를 당기는 손이 어지럽게 기판 위를 지났다. 이윽고 모든 과정을 거쳐 '등대'의 일이 시작되었다. 점등 완료까지 앞으로 10h 30m. 백라이트도 없는 구식 모니터에 퍼센테이지를 나타내는 막대가 흐릿하게 올라왔다. 세영은 화면을 확인한 뒤 빈 껌 포장지의 이음새를 뜯어 접착부에 적힌 깨알 같은 글씨를 읽기 위해 안경이 눈두덩에 눌릴 정도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네잎크로바」를 찾으셨군요! 오늘은 즐거운 날, 행운이 가득한 날!'

 

  이른 아침이었다.

 

 

 

 

  여자를 만난 것은 늦은 오후였다.

등대지기의 일이란 게 사실 대단한 건 아니었다. 동이 트면 올라와서 시스템을 구동시키고, 해가 지면 등대에 제대로 불이 들어오는지 확인한 뒤 다시 등대 아래에 있는 거처로 돌아가 잠을 청한다. 고작 그게 전부였다. 어지간해서는 밖으로 나설 일도 없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은 일정한 주기로 등대에 공급됐으니까. 뭣보다 낮에 돌아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먼지가 막처럼 하늘을 완전히 에워싼 탓에 낮이라고 해봤자 밤보다 주변을 파악하기 약간 용이할 정도로만 밝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낮에 자고 밤에 움직였다. 밤에는 그나마 먼지가 걷혀 숨을 쉴 수 있었다. 모두가 등댓불에 의지해 밤을 지낸다. 해가 뜨기 전까지 일을 하고 먹고 사랑하고 기도한다. 두터운 먼지 탓에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에너지를 내리쬐어주는 태양 덕분에 지금의 밤이 있다. 그리고 그 밤을 만드는 것이 세영의 일이었다. 세영은 자신이 언제부터 등대에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으나, 땅 끝에서 불을 밝히는 일을 그저 숙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가끔 모래폭풍이 멎었을 때 해변으로 나가 한도 끝도 없는 파도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럴 때마다 머리칼이며 수염에 먼지를 잔뜩 달고 돌아오곤 했다. 그런 일상이었다. 다만 가끔 땅의 시작에 있다는 다른 등대의 파수꾼에 대해 떠올릴 뿐이었다. 그래서 지평선에 놀이 번지기 시작할 때에 나타난 여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파문이나 다름없었다.

 

 

 

 

  세영은 분주했다. 평소 같았으면 시스템 구동 후 아래에 있는 서재로 내려가 읽고 또 읽어 한 장 한 장 마다 손때가 누덕누덕하게 밴 오만가지 책들을 펼쳐놓고 태평한 시간을 보냈겠지만 손가락 끝이 하루가 다르게 바짝 메마르고 낮이 짧아지는 것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ー잠을 잘 준비를 해야 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달력 따위를 헤아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애벌레가 때가 되면 고치를 지어 다음 계절을 준비하듯이. 흡사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겨울을 맞는 것 또한 등대지기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밤이 길어지면 등대는 제 일을 하지 못한다. 낮 동안 받을 수 있는 태양빛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암만 밤에 숨통을 틜 수 있다한들 한 치 앞을 보지 못한다면 깨어있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래서 잠을 잔다. 봄이 올 때까지 길고 긴, 대수면을. 모든 사람들이 잠에 들 동안 등대는 혼자 남아 자신의 낯을 드러내놓고 사람들이 깨어나면 다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한줌 같은 빛을 모으고 또 모은다. 그러는 동안 등대의 거룩한 임무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해 대비하는 것이 세영의 일이었다. 세영 또한 잠에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영은 구동을 마치고 평소에는 찾을 일 없는, 먼지가 수북이 앉아 회색이 도는 정비복을 꺼내 입고 등대 점검에 나섰다. 몸집만한 산소통과 방독헬맷을 쓴 채 흡사 잠수부와도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태양광 패널부터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타고 하염없이 아래로 향하며 등대에 붙들려있던 세영은 등줄기를 타고 한없이 갈라져 흘러내리는 땀줄기의 감각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태양이 한없이 눈이 부셨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일몰에 다다른 것이다. 세영은 사다리에서 풀쩍 뛰어 내려와 바닥부에 위치한 태양광 패널을 그늘 삼아 그 뒤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사적으로 땀에 전 머리를 쓸어 올리려 했으나 장갑 아래로 만져지는 헬멧의 매끈한 표면이 가로막았다. 겸연쩍게 헬멧을 두어 번 두드린 세영은 다만 깊고 길게 숨을 돌려 상체를 늘어뜨릴 뿐이었다. 한쪽 다리를 세워 산소통을 끌어안은 세영은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 따위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반나절을 훌쩍 넘긴 시간 동안 목 한 번 축이지 못이지 못한 탓에 쉽사리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지평선이 해를 삼킬 것이고 사람들은 깨어나 밤을 배회할 것이고 세영은 눈을 붙여야 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가 튀어 오르듯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세영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산소통은 확실히 내려오기 전보다 가벼웠다.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럼 다시 올라가볼까. 그대로 다시 숨을 내쉰 세영이 사다리에 오르려던 찰나, 머릿속에서 울리듯 또렷한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들었다.

 

  ー잠깐만…나를…….

 

  그 방향을 가늠할 수 없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허둥대며 고개만 돌리던 세영은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서서히 등대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몰고 오는 것의 정체를 헤아리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자 희게 빛나는 인영이 그 끝에 놓여있었다. 세영이 그대로 얼마나 멎어있었을까. 그림자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곧 발치에 닿다 못해 세영 앞으로 쏟아졌다.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주인 또한 쓰러졌다. …여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얗게 휘감은 채였다.

 

 

 

 

  세영은 누가 그의 이름을 크게 외치기라도 한 것처럼ー그의 이름을 언제 마지막으로 불렸는지 조차 까마득했지만ー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허공을 휘젓던 그의 시선은 곧 그의 앞에 놓인 희끄무레한 인영에 향했다.

 

  여자.

  꿈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미처 깨닫지 못한 어둠이 그제야 그를 휘감기 시작했다. 완연한 밤중이었다. 세영은 어설픈 자세로 겨우 일어나 서둘러 계기판으로 향했다. 도시는 여느 때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점등이 무사히 이루어진 것이다. 점등 준비야 오전에 다 마쳐 놓는다 치손, 불이 완전히 들어오는 것을 제 시간에 제대로 확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긴장이 풀린 세영은 기판에 등을 기댄 채 아래로 미끄러졌다. 여자가 보였다. 깊게 잠이 든 것인지 여자가 쉬는 고른 숨에 맞추어 하얀 몸체가 오르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세영은 어떻게 자신이 산소통과 여자를 동시에 업어 올라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올라오자마자 산소가 바닥났고, 겨우 문을 닫고 등대실에 들어왔다는 기적적인 사건들의 연속 뿐. 아마도 자신과 여자는 그 다음 바로 정신을 잃었을 테다. 세영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세영은 문득 여자가 이상할 정도로 깨끗한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약간의 모래먼지가 붙어있긴 했지만 여자가 나타난 방향으로 미루어봤을 때, 더군다나 낮이라면 흰 옷을 휘감고 이렇게 말끔히 유지하기는 힘들 터였다. 세영이 기이하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자, 마치 그것을 읽었다는 듯이 여자의 눈이 반짝 뜨였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세영은 말을 고르는 듯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말을 건넸다.

 

  “괜찮으시오?” 그러나 여자는 대답도 고갯짓도 않고 그저 세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말을 할 줄 모르시오?”

 

  여전히 대답이 없어, 세영은 멋쩍게 바닥이며 창밖을 두리번거리다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다섯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동이 틀 터였으므로 다시 잠에 들기에는 아무래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세영은 찬장으로 가서 인스턴트 커피를 꺼냈다. 두 봉을 연달아 까서 컵에 털어 넣은 세영은 물을 끓이면서 “드시겠소?” 하고 여자에게 물었으나,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세영은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두 눈만 살아있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일단 타겠소. 세영은 오랫동안 쓰지 않은, 아마도 손님용으로 두었을 다른 컵을 꺼냈다. 두 개의 컵이 조리대에 놓인 모양이 생경하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마치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양. 이윽고 물이 끓었다. 세영은 두 잔의 커피를 들고 다시 바닥으로 돌아왔다. 여자의 머리맡에 잔을 둔 세영은 그 옆에 수그리고 앉아 등대의 통창 쪽을 바라보았다. 등대로부터 퍼져나가 드문드문 도시를 수놓고 있는 빛은, 분명 낮만큼이나 밝았다. 세영은 이런 새벽 중에 자신의 낮이 일궈 낸 일상들을 목격한 것이 처음임을 깨달았다.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르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옆에 어느 새 여자가 다가앉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동이 틀 때 까지 도시를 바라보았다.

 

 

 

 

  등대 밑의 사람들은 한여름의 일출 시각과 겨울 초입 일출 시각의 차를 셈해본 적이 있을까. 셈을 해 볼 마음을 먹은 적이 있기나 할까. 밤과 아침을 가로지르는 경계에 서서, 도시를 등진 채 선 세영은 신발 끝에 닿을 듯 말 듯 찰박이는 파도를 보며 생각했다. 파도의 언덕은 머지않아 닥칠 일출과 모래폭풍에 스러질 도시의 빛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세영은 흘끗 모래 변에 수그리고 앉아 서서히 밝아지는 지평선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호흡이 만들어낸 희뿌연 김이 파도가 부서지는 박자에 맞춰 피었다가 스러지곤 했다.

여자가 나타나고 한 달 남짓이 흘렀을까.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격차를 벌이며 뚝뚝 떨어져 소매 사이로 파고드는 냉기에 퍼뜩 잠에서 깨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세영이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나 별 생각 없이 창 쪽을 바라보고 있자면, 시선의 끝에는 항상 여자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여자의 곧은 형상은 하얗게 도드라졌다. 통 잠을 자지 않는 것인지 여자를 위해 내어준 침대는 늘 단정했다.

잠이 오지 않소? …좀 걷겠소? 대답도 고갯짓도 없었지만, 세영은 자신을 돌아보는 여자의 얼굴에서 긍정의 답을 읽어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짤막한 아침 산책이 시작되었다.

세영은 늦어지는 일출 시각과 이른 기상이 만들어낸 이 삽화 같은 시간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지반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열도, 모래폭풍도 사라진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마법 같은 틈새. 그리고 여자까지. 분명 매년 겨울을 지나왔을 터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전의 겨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에 더 잠길 새도 없이, 세영은 뺨에 닿은 작고 차가운 감각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인가 일어선 여자 또한 손바닥을 든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고 있었다.

 

 

 

 

  서둘러 등대로 돌아와 '동면'의 준비를 끝내고 숨을 돌릴 때가 되자, 해가 떨어진 후였다. 마지막 점등이 무사히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세영은 겨우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아무리 대겨울을 맞을 준비를 계속 해왔다 하더라도 일이 직접 닥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이야기였다. 지금까지에 비해 조금 이른 겨울이었던 듯도 싶었다. 어찌되었건, 등대지기로서 세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로써 모두 끝이었다. 일출과 동시에 내리기 시작한 싸리 눈은 해가 기울수록 점점 기세를 더하더니 완연한 폭설이 되어 쏟아 내리고 있었다. 슬슬 깨어날 도시의 사람들도 무릎 밑까지 쌓인 눈을 보고 바로 찾아오는 새벽과 함께 동면에 들 준비를 시작할 것이었다. 그 전에 세영은 잠에 들어야 했다. 또 다시 봄이 올 테고 밤이 올 테니까. 그리고 세영은 그 전에 일어나 도시를 굽어 살펴야 할 등대지기니까.

 

  “여기, 이것을 먹으면 되오.”

 

  소파와 침대를 최대한 창 가까이 끌어다 놓으며 잠에 들 채비를 하던 세영은 여자에게 수면제를 한 알 건네고는, 자신도 바로 한 알을 털어 넣었다. 봄이 오기 전에 섣불리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이 이렇게 오래 있을 것이라곤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그렇다고 밖에서 겨울을 지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세영은 말을 이어가면서, 소파로 가서 누워 담요를 턱 끝까지 한껏 끌어올렸다.

 

  “침대에서 자도록 해요. 내 그대가 잠에 드는 모습을 통 본 적이 없지만 일단 자야할 것 아니겠소. 봄까지는 나도 잠들어 있을테니까…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눈 아니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잠들 수 있다니…….”

 

  약효가 들기 시작하자, 세영의 말이 점점 더뎌졌다. 여자는 소파로 다가오더니 세영의 머리맡에 선 채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여자의 머리를 휘감은 하얀 천이 흘러내려 그대로 쏟아진 긴 머리카락이 세영의 얼굴에, 바닥에 늘어졌다.

 

  또 올게요. 날 기다려요. 겨울을.

 

  희미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세영은 눈을 감았다.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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